유능한 방송작가 지숙(박진희)은 어느 날 고향으로 가는 기차에 오른다. 그리고 고향집에서 엄마(김해숙)와 특별한 2박3일을 보내고 돌아온다. <친정엄마>의 내용을 아주 간단히 줄이면 이렇다. 영화는 서울역 앞에서 시작되는데 관객은 이미 이 시점부터 지숙이 안 좋은 상황이라는 걸 짐작하게 된다. 기차에 오른 지숙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다음 장면부터는 어린 시절 회상이 이어진다. 지숙은 동네 어른들이 “넌 말을 잘하니 커서 버스 안내양이 되어라”라고 말하던 걸 기억하며, 말 잘하는 사람으로 변호사도 아니고 버스 안내양을 떠올릴 정도로 자신의 고향 마을이 궁벽한 곳임을 설명한다. 밝고 천진한 유년기를 보낸 지숙은 사춘기에 접어들자 생에 대한 고뇌에 빠지게 된다. 초라한 모습으로 학교를 찾아온 엄마도 싫고 매일 술에 절어 엄마를 학대하는 아버지도 미운 지숙은 빨리 고향을 떠날 수 있길 기도하며 질풍노도의 시기를 겨우 버텨간다. 드디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숙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한다. 영화의 서사는 지숙의 성장과 변화를 따라가지만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은 엄마의 헌신이다. 못 배운 걸 한스럽게 생각하는 엄마는 공부 잘하고 야무진 딸을 인생의 자랑으로 여기며 오직 자식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엄마를 창피하게 생각했던 지숙도 점차 엄마를 이해하고 같은 여성으로서 엄마에게 연민을 갖는다.
지숙의 회상이 끝나고 현재의 여정으로 돌아오면서부터 영화의 본론이 펼쳐지게 된다. 무조건 헌신적인 엄마와 죽음을 앞둔 딸이 보내는 시간은 눈물로 얼룩질 것이라 추측하게 되지만 이 영화는 고색창연한 신파에서 발을 빼기 위해 애쓴다. 그러기 위해서 딸은 엄마에게 자신의 상태를 알리지 않고, 엄마는 2박3일의 여정 끝에서야 진실을 알게 된다. 그저 딸이 부부싸움을 하고 찾아온 거려니 짐작하는 엄마가 딸이 좋아하는 반찬으로 밥상을 차려주는 장면은 강한 최루성 도발이 아니라 조용히 먹먹해지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의 가장 슬픈 대목은 사진관에서 두 사람이 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여기서 관객은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석규가 자기 영정 사진을 스스로 찍을 때 느꼈던 그런 슬픔을 체험하게 된다. 이처럼 시놉시스를 보고 연상한 것보다 영화는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지숙의 투병생활을 생략한 것도 신파를 견제하기 위한 서사 전략으로 보인다.
엄마와 딸이 있고 둘 중 한명이 병에 걸려 죽게 된다는 설정이 낯익다. 지난해에 개봉한 <애자>가 떠오른다. 엄마와 딸의 관계를 다룬 영화라는 점은 같지만 이번에는 딸이 아프다. 사실 <친정엄마>는 <애자>와 전혀 다른 분위기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과 극적 갈등의 원인 자체가 유사해서 친연성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두 영화의 딸들은 글을 쓰는 직업을 가졌고 공교롭게도 그 딸들의 직장상사로 등장하는 배우(장영남)도 같다.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엄마의 캐릭터다. <애자>의 엄마가 아들만 편애하는 듯 보인다면, <친정엄마>의 엄마는 반대로 딸만 편애한다. 엄마와 딸은 모성 멜로드라마에 단골 출연하는 조합으로 관객은 둘의 관계에 대한 전형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세상에서 자기 자신 말고 자기를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엄마에게는 딸이요 딸에게는 엄마다. <애자>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이 사실을 약간 비틀었다. 강한 캐릭터의 엄마와 딸이 서로 으르렁대게 만들어 신선함을 주었으나 결론에서는 예상대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결과적으로는 보편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지만 다소 예외적인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통해 우회하는 이런 방식이 요즘 세태에 어울리는 것 같다. 이와는 달리 <친정엄마>는 시류와 무관하게 엄마라는 존재의 이데아 같은 걸 그리고 있다. 딸을 편애한다는 점이 유일하게 이색적이다. “엄마 때문에 못살아!”라고 딸이 투정해도 “난 너 때문에 산다”라며 웃는 엄마의 애정은 흔들림이 없다. 딸이 눈물 흘리면 피눈물을 흘리고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이 딸을 낳은 것이라고 엄마는 말한다. 모성 이데올로기에 설령 허구성이 있다 해도 이런 엄마의 모습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녀 동반 나들이용으로 좋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