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 이미 이 이름은, 자신만의 비밀스런 꿈을 간직한 채 미래로 나아가는 모든 청춘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광산노동자가 아닌 발레리노가 되겠다는 소년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 우리 모두 같은 마음으로 울고 웃었다. 스티븐 달드리의 영화 <빌리 엘리어트>가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가장 화제를 모으는 장본인이다. 오는 8월 한국에서도 라이선스 공연으로 선보일 <빌리 엘리어트>를, 런던에서 미리 관람하는 기회를 가졌다.
3월31일, 맑고 추운 수요일 저녁이었다. 빅토리아역 근방, 빅토리아 팰리스 시어터 앞에는 이미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은 극장 바로 옆의 펍에서 감자와 맥주를 시켜 먹으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10대 소녀들은 마치 동경하는 팝스타를 기다리듯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쁘게 차려입은 채 발개진 얼굴로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앞에서 청바지에 튀튀스커트를 받쳐 입은 스탭들이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 5주년입니다!”라고 외치며 행인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근처 거리 곳곳에는 현재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 중인 연극과 뮤지컬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그중 <금발이 너무해> <맘마미아!> 등 기존의 유명 (영화 원작) 뮤지컬뿐 아니라 <더티 댄싱> <프리실라> 등 새로운 (영화 원작) 뮤지컬이 눈길을 끌었다. 스토리만큼이나, 어쩌면 스토리 자체보다 더 강한 호소력을 불러일으키는 삽입곡과 비주얼을 겸비한 영화들이 뮤지컬로 환골탈태하는 경향이 최신 트렌드임은 명백했다. 그렇다면 스티븐 달드리의 <빌리 엘리어트>는 어떨까. 영화 속 빌리가 추던 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클래시와 더 잼과 잊을 수 없는 티-렉스의 노래들. 관객 개개인의 내면으로부터 어떤 본질적인 향수와 동경의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던 그 컴필레이션. 이 모든 요소들이 엘튼 존의 ‘오리지널’ 음악에 실려 전달될 때, 그때 그 시절의 감동도 고스란히 보존될까? 보기 전에는 말할 수 없다. 오늘은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 탄생 5주년 기념 스페셜 공연이 열리는 날이다.
멈출수 없는 춤의 열정, 관객을 열광시키다
1984년 영국 북부 더햄. 마거릿 대처 총리의 신보수주의 정책에 맞닥뜨린 광산노동자들이 격렬하게 저항한다. ‘폐광은 우리 마을을 죽이는 길이다’라는 팻말을 든 채, 대처의 폐광 결정에 반발하는 광산노동자들은 파업을 결의하며 노래를 끝낸다. “우리가 승리하는 날까지, 모두 함께 하리라!” 빌리가 등장한다. 뮤지컬 속에서 빌리는 조금 더 외롭다. 무뚝뚝한 아버지와 혈기왕성한 형은 자기들끼리 투닥거리느라 정신없고, 할머니는 치매에 걸려 있다. 어머니는 예전에 세상을 떠났다. 아무도 빌리에게 제대로 된 아침을 챙겨주지 않아 그는 대충 빵으로 때우거나 굶는다. 그러다가 그는 우연하게 발레를 접한다. 플리에, 탕뒤, 아라베스크, 그랑 주테, 애티튜드, 피루엣. 빌리는 약간 겁을 먹은 듯, 호기심을 느낀 듯 발레 동작을 지켜본다. 발레를 가르치는 윌킨스 부인이 묻는다. “꼬마야, 한번도 춤춰본 적 없니?” “춤이라고요? 발레? 당치 않은 말씀 하시네요.” 그러나 윌킨스 부인이 피루엣 동작을 소녀들에게 가르치며 호통칠 때 빌리는 시험삼아 따라해본다. 스폿 지점을 정하고, 끝까지 그 지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순식간에 회전, 몸의 균형을 잃지 않고. 빌리는 성공한다. 그리고 사각거리는 튀튀와 분홍색 토슈즈의 세계에 순식간에 빠져든다.
우리 모두는 이 이야기를 알고 있다. 가혹한 사회환경, 생존의 위기, 가장과 노동자로 정체성이 규정되는 남성다움의 강요. 그 속에서 발레에 눈을 뜬 소년이 어떻게 온몸으로 편견에 부딪히고 상처받고 결국엔 모두를 설득하고야 마는가.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이야기를 그대로 물려받지만, 3시간짜리 뮤지컬은 1시간50분짜리 영화보다 조금 더 설명적이고 조금 더 감상적이다. 죽은 어머니와 빌리 사이의 끈끈한 유대관계는 노래 <Dear Billy(Mom’s letter)>로 울려퍼지고, 다수의 관객은 여기서부터 울먹거리기 시작한다(호주 시드니에서 공연할 당시 빌리를 연기한 배우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실제로 울음을 터뜨려서 대사를 제대로 잇지 못했다고 한다). 빌리의 진로를 놓고 아버지와 형이 대립하는 장면도 <He Could Be a Star>의 절절한 이중창(“아마도 그 애는 스타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리는 그 애가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지 모르잖니. 그 애는 떠날 수 있고 빛날 수 있어. 여기서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얘야, 우리는 그애에게 삶을 줄 수 있어.” “아빠, 그 애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모두의 문제예요. 모두의 기회고요. 모두의 미래, 모두의 과거예요. 춤추겠다는 꼬맹이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권리의 문제예요. 우리가 치른 희생을 생각해보세요”)을 통해, 거의 멱살잡이에 가깝도록 고통스럽게 폭발한다.
영화만큼이나, 어쩌면 영화보다 더 선명하게 당시 사회상을 명시하고, 노동자 파업을 마주하는 창작자의 (긍정적) 태도는 관객에게도 그대로 전염된다. 동시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만 흐르지 않도록 멜로드라마적 요소까지 강화된다. 영화의 섬세한 클로즈업 대신(제이미 벨의 어떤 특정한 표정이 보여주던 잊을 수 없는 결핍의 정서와 황폐한 서정미!), 노래와 춤으로 직접적인 정서를 표현하다 보니 감정의 진폭도 커진다. 발레를 금지당한 빌리가 4분30여초 동안 신들린 듯 탭댄스를 추며 분노를 폭발시키는 <Angry Dance>신의 경우, 이해받지 못하는 소년의 고통은 매우 직접적으로 육체화된다. 그는 다리가 저리고 아플 때까지 춤을 멈추지 못한다. 그는 질질 끌리는 다리를 손으로 부여잡으며 계속 탭댄스를 춘다. 그는 ‘분홍신’을 신은 소년이다. 그는 전기에 감전되었다. 그는 멈출 수 없다. 관객 역시 박수를 멈출 수 없었다. 3시간의 공연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마침내 막이 내리는 순간 특별한 세리머니가 펼쳐졌다. 5주년 행사를 위해 그동안 런던 공연에 빌리 엘리어트 역으로 뽑혔던 22명의 배우들이 일제히 무대에 뛰어올라와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박수 갈채, 폭죽, 즐거운 탄성. 그날 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그렇게 모두에게 꿈결처럼 커다란 선물이 되었다.
엘튼 존의 열성적인 후원이 만든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가 2000년 처음 영화로 등장한 이래 10년 동안 끊임없이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이 작품 자체의 고유한 동력 때문이다. 그러니까 빌리 엘리어트의 여러 ‘분신’들이 이 작품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먼저 리 홀의 각본이 있다. 리 홀은 1980년대 초반 영국 북동부 지역에서 10대 시절을 보냈다. “나는 1979년 중학교 1학년 때 마거릿 대처가 총리로 선출된 다음날 선생님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진정한 낙담의 표정이었다. 이후 10년 동안, 실업은 빠르게 퍼져갔고 대처는 나의 고향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모든 것들을 공격했다. 산업화의 유산, 공통의 목적의식. 난폭한 유머마저 대처가 상징하는 중산층의 속물근성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듯했다.” 리 홀은 문학에서 도피처를 찾았고, 마치 “빌리 엘리어트에게 로열발레스쿨이 그랬듯, 내게 케임브리지대학은 구원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리 홀은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한 이후, 이미 북동부 지역 고향에서 모든 영감의 원천을 획득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어디서 왔는가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그때부터 글을 썼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글에는 그의 자전적인 경험이 배어들어 있었다. <빌리 엘리어트> 역시 그러했다. 2000년 칸국제영화제에서 <빌리 엘리어트> 프리미어 상영을 본 뒤 울음을 멈추질 못하고, 급기야 영화가 끝날 때쯤에는 일행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나와야 했던 엘튼 존도 빌리 엘리어트에게 강렬한 감정이입을 했다. 그 역시 어머니와 할머니의 헌신적인 지지와 희생을 통해, 답답한 고향으로부터 도망쳐 로열 아카데미 오브 뮤직에 입학하면서 삶이 뒤바뀌었던 것이다. 엘튼 존은 <빌리 엘리어트> 5주년 기념행사 직전 무대에 올라, “내가 이 뮤지컬 작업을 자청한 것은 자연의 섭리처럼 당연한 수순(force of nature)”이었다고까지 표현했다.
엘튼 존의 열성적인 후원에 힘입어 리 홀과 스티븐 달드리가 뮤지컬의 각본과 연출을 다시 한번 맡고, 제작사 워킹 타이틀와 유니버설픽처스 스테이지 프로덕션이 가세하면서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의 꿈은 이루어졌다, 2005년 영국에서 초연된 뒤 <빌리 엘리어트>는 시드니와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했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2009년 63회 토니 어워드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연출상, 각본상, 음악감독상 등 10개 부문을 휩쓴 것이다. 언론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호들갑을 떨었다. “영국 뮤지컬 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 “<해리 포터> 이후 영국이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 “가끔은 별 다섯개도 부족하다”…. 이제 그 감동은, 오는 8월 개막하는 <빌리 엘리어트> 한국 공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획사 매지스텔라에서 주관하는 이 공연은 비영어권 국가로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라이선스 공연이다. “설명할 수 없어요. 표현할 길이 없어요. 내 귓가에서 음악이 울려퍼지면, 나는 듣고, 또 들어요. 그러다가 나는 사라져가요. 그리고 변해가요. 내 안 깊숙이 불길이 타올라요.… 그때 나는 자유로워져요.”(<Electricity> 중에서) 빌리가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출 때 느끼는 그 감정을, 당신도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을 보면서 느끼게 될 것이다. 장담한다.
“티-렉스의 음악은 언제나 옳다”
연출자 스티븐 달드리 현지 인터뷰
-영화 <빌리 엘리어트>가 나온 지 10년이 지났다. 본인에게 이 영화는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가. =<빌리 엘리어트>는 영국의 역사를 아주 현실적으로 반영하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를 다루는 이야기다. 공동체가 개인보다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사회에서, 한 아이가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 꿈은 공동체를 위협한다. 공동체는 아이를 보면서 자신에게 임박한 소멸의 운명을 깨닫는다. 자신이 나이먹었고 죽어가고 있다는 상실의 감각 말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의 가슴 찢기는 고통 또한 작품에 포함되어 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연출한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다. =너무너무 무서웠다. 2005년 런던에서 첫 번째 무대 막이 올랐을 때에는, 솔직히 그전에 정확한 리허설을 완수했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첫 공연이 처음으로 제대로 끝까지 한 리허설이었다는 게 맞다. (웃음) 공연 내내 손에 땀을 쥐며 걱정했다.
-어쩌면 영화의 음악 선곡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엘튼 존 역시 음악적 자극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정말 고맙다. 티-렉스의 음악은 언제나 옳다. (웃음) 영화 곳곳에 클래시나 더 잼의 노래를 조금씩 끼워넣었지만, 여건만 허락한다면 티-렉스의 음악을 더 많이 넣고 싶었다. 그러나 저작권료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관객은 저마다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서, 빌리뿐 아니라 다른 캐릭터에게도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그 공평함이 이 작품의 멋진 점이다. 당신은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누구에게 이끌렸는가.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마이클.
-영화처럼 뮤지컬에서도 발레와 탭댄스는 주요한 대구를 이루는 장치다. 이렇게 대비되는 춤 두 가지를 선택한 이유는. =음… 사실 영화에선 발레만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우연히 제이미 벨이 탭댄스를 잘 춘다는 걸 알게 되어 삽입했다. 우연이었다. 그리고 뮤지컬 오디션을 처음 볼 때도 발레보다는 탭댄스에 능한 아이들이 많았다. 순전히 아이들에게 달린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