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 너머로 거대한 토네이도가 다가온다. 학생들은 대피령도 아랑곳 않고 꿈틀거리며 질주해오는 회색 소용돌이의 몸부림을 홀린 듯 바라본다. 학교 앞뜰에 세워진 깃대에는 성조기가 찢어질 듯 나부끼고 있다. 한 학생이 소리친다. “성조기 때문에 깃대가 부러지겠네.” <시리어스 맨>의 이 마지막 대사는 기묘하다. 물론 해결책은 간단하다. 성조기를 떼내면 깃대는 안전할 것이다. 그런데 성조기를 삭제하는 순간 깃대는 아무 쓸모없는 사물이 되고 만다. 아마도 부드러운 성조기가 찢어지기 전에 단단한 깃대가 먼저 부러질 것이다. 하나의 기호일 뿐인 깃발과 그 텅 빈 기호를 필사적으로 지지하는 실정적 사물인 깃대. 어느 쪽을 먼저 염려해야 하는가. 혹은 임박한 재난 앞에서 그것은 염려할 만한 가치가 있기나 한가.
알 수 없음을 위해 알아야 하는 것들
물론 이건 <시리어스 맨>의 많은 퀴즈 가운데 하나다. 비슷한 계열의 퀴즈 가운데 하나는 주인공인 물리학 교수 래리가 성인 키의 두배쯤 되는 과도하게 큰 칠판에 가득 적어놓은 불확정성의 원리의 수학적 증명이다. 100여명의 학생 중 누구도 그 난해하기 짝이 없는 증명에 관심이 없는 눈치다. 래리는 소리친다. “우리는 결국 알 수 없다는 거지. 하지만 이건 중간고사를 위해 알아야 돼.” 우리는 왜 결국 알 수 없다는 걸 깨닫기 위해 그토록 고달프고 복잡한 앎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가. 이 퀴즈들은 정답이 뒷장에 적혀 있는 질문이 아니다. 정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당신에게 이 영화를 만든 코언 형제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누가 알겠어?” 더욱 미심쩍어 하는 당신이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거지?”라고 다시 묻는다면 그들은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무슨 상관이지?” 이 무성의하지만 명쾌한 대답은 사면초가에 빠진 래리에게 랍비가 들려주는 극중 대사이다.
<시리어스 맨>을 보고 구약의 욥기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화의 무대는 미국의 중산층 유대인 마을이며, 신실한 유대교 신자 래리는 욥처럼 밑도 끝도 없는 시련의 파노라마에 봉착한다. 하지만 욥의 시련은 많은 서사의 단골 모티브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공고한 믿음이 평온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도리어 믿음에 대한 잔인한 시험을 불러온다는 욥기의 가혹한 역설이 이야기꾼들을 매혹시켰을 것이다(8장7절 ‘네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구절을 앞세워 욥기를 보수신앙의 범주로 전용하는 해석도 있으나 이것은 내가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욥이라면 일련의 시련 끝에 절망적으로 신에게 질문할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케보이’) 이 질문은 차마 입 밖에 꺼내기 두렵다. 신이 너무 과도한 것을 원하는 것이 두려워서라기보다, 신이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정말 두렵기 때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신의 무응답을 유대교의 핵심이라고 본 슬라보예 지젝은 그 근거를 ‘신의 이미지를 만들지 말라’는 유대교의 계율에서 찾는다.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와 달리 유대교는 ‘불안의 종교’이며 유대교 신자는 그러므로 모두 욥의 위치에 놓인다는 것이다. 신이 자신들을 선택했는데, 왜 선택했는지 알지 못하는 선민들의 불안, 혹은 대타자의 욕망을 알지 못하는 주체의 불안. 유대인의 이 불안은 그래서 비신자들에게도 쉽게 감염된다.
예컨대, 성조기든 태극기든 깃발은 텅 빈 기호이기 때문에 강력하다. 그것에 무언가 실정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면 우리는 수용하거나 거부할 것이다. 그것이 텅 빈 채 우리를 내려다보는 한 우리는 불안을 벗어날 수 없다(깃발의 소재가 부드러운 직물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크게 펄럭이지만 작게 접혀 보관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은 단단한 깃대나 보관함보다 언제나 강하다). 한 개그맨이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냐”라고 당당하게 소리칠 때 그것이 유쾌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가 만취했기 때문이다. 깨어 있을 때 그는 ‘해준 게 뭐 있냐’를 ‘바라는 게 뭐냐’로 자기도 모르게 바꿔 묻고 있을 것이다. 그 취중 호언은 텅 빈 깃발을 쳐다보는 자의 불안을 위장하는 ‘케보이’의 이본이다. 그러므로 신이 아니라 자연, 인류, 국가 혹은 가족, 연인에게라도 대답을 들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영화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시리어스 맨>은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한 사람들의 영화다. 실은 대답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당신이야말로 듣지 못했을지 모른다는 불길한 속삭임의 영화다. 그런데 그 말투가 얼마나 간드러진지 우리가 그 속삭임이 거의 저주라는 사실은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지나서야 눈치채게 된다.
<셔터 아일랜드>의 스코시즈답지 않음
(아래는 스포일러 있습니다.) 함께 개봉관에 걸려 있는 마틴 스코시즈의 <셔터 아일랜드>를 먼저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스코시즈의 사내들이야말로 구원의 대답을 찾아 세속 도시를 떠도는 탕아였다. 정말 욥기의 번안과도 같은 <특근>(1985)을 제외한다면 그 사내들의 시련은 대개 자기 파괴적 충동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에게 물어볼 수 없다. 유대인과 달리 질문할 능력도 자격도 없는 사내, 그의 불능과 비천함, 걷잡을 수 없는 죽음에의 충동보다 신의 대답을 향한 더 간절한 갈구를 상상하기 힘들다. 물론 우리가 스코시즈의 영화를 사랑했다면 그것은 성서적인 주제의 서사가 아니라 일련의 반복되는 몸짓 때문일 것이다. 깊이 가라앉아 하나의 세속적이고 기술적 행위에 자기가 삼켜지기를 바라는 듯, 반복되는 말과 동작들의 허망하고도 처연한 잉여들. 택시 기사 트래비스 비클은 거울을 보며 “나한테 말한 거야?”라고 몇번이고 되뇌며, 3류 코미디언으로 전락한 전 권투 챔피언 제이크 라모타는 대기실 거울 앞에서 흉하게 살찐 모습으로 신음과도 같은 기합 소리를 내며 허공에 주먹을 끝없이 휘두른다. 그 반복은 영원한 불안에 갇힌 자의 자기 퍼포먼스이다. E. M.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에 나오는 구절 “같은 자세가 된다는 것은 때로 마술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그것은 영원한 우정을 암시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다”를 이렇게 바꿔 쓸 수 있을 것이다. ‘같은 행위를 거울을 보며 혼자 반복한다는 것은 마술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그것은 영원한 불안을 암시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다.’
스코시즈의 실망스런 최근 작품들에 비하면 <셔터 아일랜드>는 흥미로우며 단단하고 치밀해 보인다. 그런데 그 치밀함이 문제다. 자식 셋을 살해한 우울증 환자 아내, 그 아내를 죽인 사내의 이야기. 이런 강력한 외상적 사건을 스코시즈답지 않게 끌어들이는 순간 서사는 외길 수순이다. 정신병자가 되거나 자살하거나. 예상대로 2차대전 참전 군인이자 전직 수사관인 사내는 자신을 여전히 정의로운 연방 수사관이라고 믿는 정신병자가 되었고, 진실을 안 다음 사실상 자살의 길을 택한다. 물론 그의 사적 진실은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진다.
이 영화에서 정작 흥미로운 것은 이런 반전 드라마의 재기가 아니다. 갇힌 섬에 들어온 사내에게 아내의 환영은 등대에 가지 말라고 말한다. 사내는 지금 등대에서 나치 시절과 같은 인간 생체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텅 비어 있음이 진실이다. 그곳에 가는 순간 정신병자라는 원래의 자기로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그곳에 가지 않으면 그의 정신질환이 빚어낸 가상의 정체성은 완성되지 않는다. 연방정부의 묵인 아래 이루어지는 생체 실험이라는 (가상의) 국가적 범죄야말로 사내가 자신의 (가상의) 정체성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다.
'미친 아내가 세 아이를 죽였고, 아내를 자신이 죽였다’는 사내의 사적 진실이 끔찍한 것은 그것이 해명될 수도 개입될 수도 없다는 점이다. 나치즘과 인간 생체 실험이라는 실제로도 존재했던 집단적 범죄는 사내의 사적 사건에 비한다면 훨씬 더 잔혹한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애란 대립항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는 휴머니즘의 환상을 허용한다. <셔터 아일랜드>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어느 쪽이 더 견딜 만한가. 사내는 후자가 더 견딜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정신질환에 걸린 게 아니라, 그것을 선택했다. 다시 진실을 알게 된 뒤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는 여전히 “생체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정신병자처럼 말한 뒤, “괴물로 사는 것보다는 인간으로 죽는 게 낫지”라고 덧붙인다. 이 말이 섬뜩한 이유는 정신병 치료의 최악의 방식인 식물인간의 길을 그가 사실상 자발적을 택했다는 사실에 있다기보다, 인간이 괴물적이라는 진실보다 인간이 인간적이라는 환상을 위해 집단적 죄악를 필요로 한다는 데 있다. 사내는 살아 있는 동안 텅 빈 등대(사내는 그걸 알고 있다), 그러나 죄악의 등대(동시에 사내는 그렇게 믿고 있다)라는 환상을 향한 진격을 반복할 것이다. 여기에 불안을 해소해줄 대답은 없다.
<셔터 아일랜드>의 사내는 가까스로 트래비스 비클과 제이크 라모타의 혈연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스코시즈의 다른 걸작들에 비해 울림이 적다. 이례적으로 끔찍한 사건이 출발점이자 귀결점으로 설정되는 동안, 그 외상적 사건이 모든 몸짓을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서사를 지켜보며, ‘저런 끔찍한 일이 저 가련한 이에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문에 안주한다. 놀랍게도 여기서 국가-정신병원이라는 기구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선한 시스템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내의 허망한 진격은 하나의 특별한 불행으로 밀려난다. <셔터 아일랜드>의 불안의 가벼운 전염성은 이 때문일 것이다.
코언 형제, 원인 규명을 원하는 우리를 희롱하다
<시리어스 맨>은 반대의 길을 걷는다. 첫 시퀀스는 정말 이상하다. 시대도 지역도 짐작할 수 없는 옛 유대인 마을의 민가에 한 랍비가 방문한다. 남자는 랍비가 좀전에 자기에게 선행을 베풀었으므로 수프를 대접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아내는 그 랍비가 3년 전에 죽은 존재이므로 악령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송곳으로 찌른다. 피를 흘리면서 랍비는 떠난다. 이어질 영화 속 현재 이야기와는, 유대인 마을이 무대라는 사실 말고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 시퀀스는 1:1.33의 비율로 찍혔다. 인과관계처럼 이어붙여져 있으나 내용적으로 무관할 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는 TV화면과 극장 스크린으로 분리시켜 놓았다. 이것은 인과가 아니라 오직 순차적 관계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습관대로 이 첫 시쿼스를 외상적 사건의 자리에 가져다놓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시퀀스가 이후에 벌어질 래리의 시련과 어떤 연관이라도 있는가. 심지어 우리는 이런 의문들, 그 랍비는 사람인가, 유령인가. 아내는 정말 무언가 불경스러운 일을 하기나 한 것인가, 오히려 가족의 평화를 위해 할 일을 한 것인가, 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첫 시퀀스를 이후 래리가 맞는 일련의 시련들에 관계된 외상적 사건으로 끌어들이려는 순간, 우리는 지독한 애매함의 덫에 걸려든다. 코언 형제는 외상적 사건이라는 원인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지금 시련과 불안의 명백한 원인을 은밀히 원하는 우리의 소망을 희롱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신의 무응답에 동반되는 외상적 사건은 여기서 이웃이라는,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일상적 지옥으로 변용된다. 오래전에 등장한 그 죽지 않은(‘undead’인지 ‘not dead’인지 불분명하지만) 랍비는 영화 속 오늘의 래리에게 온갖 이웃으로 다시 나타난다. 정원의 경계를 교묘하게 침범하는 독일계 이웃 브란트, 같은 유대인이며 15년 친구이지만 아내를 가로채는 싸이, 이교도이며 나체로 일광욕을 하는 매혹적인 샘스키 부인, ‘문화 충돌’을 주장하며 학점 수정과 뇌물 받기를 요구하는 한국계 클라이브 부자, 적인지 친구인지 불분명한 동료 교수 등등. 그에게는 가족도 지옥의 이웃이다. 부모의 이혼 여부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부모의 돈을 훔치고 서로 훔치는 두 아이, 세계의 원리를 해명하는 ‘멘타쿨루스’의 도식을 완성하지만 이를 도박에 사용하다 체포되는 덜떨어진 동생 아서, 무엇보다 난데없이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
래리에게 이들의 공통점은 한 가지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죽은 이웃이 좋은 이웃’이라는 유명한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은 싸이의 장례비용까지 래리의 몫으로 돌아온다. 이웃의 자세를 갖춘 단 한 사람은 나치스트처럼 보이는 브란트다. 그는 클라이브의 아버지가 래리에게 ‘문화 충돌’을 주장하며 명예훼손 피소나 학점 수정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할 때. “그 사람이 지금 괴롭히고 있나?”라며 래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는 꿈속에서 래리 형제에게 ‘더러운 유대인 놈’이라며 총을 겨눈다.
<시리어스 맨>, 가장 무서운 농담
배신, 모략, 간통, 절도, 매수, 협박, 죽음, 영토 침범, 인종주의 그 모든 것이 일상의 수면을 자맥질할 때, 그래서 서구사회를 지탱하는 중핵인 얄팍한 관용과 복잡한 법률로 간신히 유지되던 타인과의 안전한 거리가 금가기 시작했을 때, 래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뿐이다. 결국 신의 대답을 원하는 그에게 들려주는 랍비의 말, “누가 알겠는가?” 혹은 가장 지혜로워 보이는 늙은 랍비가 반복하는 팝송 가사 “진실이 거짓으로 드러날 때… 나는 사랑할 누군가를 원해.” 신은 여전히 대답할 생각이 없고, 질문은 허공에 떠돈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거의 교활한 이런 아이러니의 기교가 아니다. 래리의 아들 대니는 급우 페이글에게 마리화나를 얻고 돈을 갚지 못한다. 돈을 끼워둔 소형 카세트를 압수당했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에 돈을 전해주려는 노력은 꼭 실패한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수업시간 외엔 대면하지 못하는 듯, 하굣길에 다시 마추친다. 대니는 집을 향해 도망가고 거구이지만 둔한 페이글은 대니를 향해 달리다가 대니가 집에 들어가는 순간, 포기하고 돌아선다. 난쟁이 마을을 찾은 거인처럼 보이는 페이글의 뒷모습, 그리고 그가 등장하자 곧바로 뛰기 시작하는 대니. 해결되지 않는 채무, 좁혀지지 않는 거리, 버튼이 눌러진 기계처럼 반복되는 쫓기와 쫓기기. 두 아이의 우스꽝스러운 이 몸짓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역동적이고 전향적인 순간이다. 래리의 지옥 같은 이웃들이 보여주는 그토록 우아한 태도가 아니라, 이 아이들의 비루한 채무 관계로 인한 어설픈 동형의 달리기야말로 어쩌면 유일한 우정의 순간일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잔인하다. 마침내 돈을 되찾은 대니가 비로소 교실 밖에서 페이글을 부를 때, 등만 보이던 그 거구의 아이는 처음으로 우리에게 정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뒤에는 거대한 토네이도가 다가온다. 다시 산산조각나는 질문. 당신은 정녕 무엇을 원하십니까. <시리어스 맨>은 거의 농담이지만, 내가 아는 가장 무서운 농담이자 묵시록의 유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