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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그 거대한 질문에 귀기울이라

<경계도시2>, 철학보다 먼저 움직이는 예술이란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밀란 쿤데라) 2003년 10월22일, 검찰에 자진 출두한 송두율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그날 저녁 그는 서울구치소에 입감된다. 저녁 어스름, 검찰청 앞, 수사관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이송차량으로 옮겨지는 송두율에게, 수많은 기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든다. 기자들은 송두율의 모습을 찍기 위해 차의 보닛을 점령하고 연신 플래시를 터트린다. 그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려는 듯, 차는 계속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때까지 송두율 교수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특권적 위치’에 있던 <경계도시2>의 카메라는, 그 순간 그 ‘광란의 경쟁’에서 가장 먼 곳으로 밀려나 있다. 아니, 그 카메라는 그 현장으로부터 서서히 뒤로 물러서고 있다(감독에 따르면, 당시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감독 자신은 그 현장에 있지 못했고, 이 장면은 그곳에 있던 제작진 중의 한 사람에 의해 ‘우연히’ 촬영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감독은 이 장면 위에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을 덧붙인다. “10월22일, 귀국한 지 한달 만에 송 교수가 구속되면서 아우성치던 언론은 입을 닫았고, 사건은 세 번째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국사회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망각의 시간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경계도시2>는 그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

송두율 사건이 ‘우리 모두의 패배’인 이유는

앞의 장면과 감독의 독백은, <경계도시2>의 출발점과 도달점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때 ‘이데올로기의 광풍’의 현장으로부터 뒤로 물러서던 카메라가 찾고 있었던 것이 ‘성찰의 자리’였다면, 그 장면 위에 나중에 더빙된 감독의 말은 오랜 고뇌 끝에 도달한 ‘명징한 결단’의 결과였다. 이 장면은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정확히 말하자면, 104분의 러닝타임 중 대략 4/5지점에 해당하는 84분 무렵)에 등장한다. 이른바 ‘송두율 사건’은, ‘민주화기념사업회’에서 송두율 교수의 초청을 발표한 2003년 9월 17일부터, 송두율 교수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출국한 2004년 8월5일까지, 약 11개월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있었던 일이다(2008년 대법원의 최종 무죄판결까지를 고려하면, 약 5년 동안 지속된 사건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그 11개월(또는 5년) 중에서 처음 한달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경계도시2>가 ‘진정한 성찰의 영화’라면, 그 ‘성찰’은 무엇보다 이 영화의 ‘틀’로 표현되고 있다(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영화의 구체적인 틀거리를 짜는 데만 2년이 걸렸다”고 고백하고 있다). <경계도시2>는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사건의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했던 ‘심리적 시간’을 선택하고 응시한다. 그 ‘심리적 시간’은 우리 모두가 그를 ‘도덕적으로 단죄한 뒤 잊어버린 시간’이다.

사실, ‘송두율 사건’은 2004년의 대법원 무죄판결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지금도 엄존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노정한 사건이기도 했다. 국가보안법은 개인의 ‘행위가 아닌 사상’을 심판할 것을 사법부에 강요하는 지구상 몇 안되는 전근대적인 법 중의 하나다. 2004년, 대법원은 검찰의 기소가 “40%의 확신, 60%의 심증”에 근거한 것이었다며, ‘항소심에서 (유일하게) 유죄가 인정되었던 독일 국적 취득 뒤의 북한 방문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남한의 사법부가 ‘구체적인 이적행위’가 없는 송두율의 ‘사상’을 법적으로 심판할 수 없음을, 다시 말해 ‘국가보안법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송두율 사건’은, 국가보안법에 맞선 송 교수와 남한 진보진영의 투쟁과 승리로 ‘기억’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경계도시2>는 냉철하게도, 그와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여, 그 사건을 ‘우리 모두의 패배’로 ‘기억’해야 한다고 ‘명징한 결단’을 내린다. 그 ‘결단’은, ‘도덕에 맞서는 윤리적 결단’이고, 진정으로 ‘반시대적인 예술의지’의 표현이다.

<경계도시2>는 결코 ‘한 개인을 무너뜨리는 집단’에 대한 ‘때늦은 반성과 참회’의 영화가 아니다. <경계도시2>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한 개인을 무너뜨릴 수 있는 한국사회의 ‘구조와 메커니즘’이며, 그 구조와 메커니즘은 여전히 강고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이 작동하고 있었다. 보수세력(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은, 2002년 대선 패배를 만회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데올로기의 광풍’ 분위기를 조성한다. 낙관 분위기에 젖어 있던 진보진영은 이러한 보수세력의 ‘기습’에 당황한 채, 다가온 총선을 의식한 ‘현실정치의 논리’에 따라서, 송 교수에게 ‘전술적 후퇴’ 즉 사실상의 ‘전향’을 강요한다. 결국 진보진영은 송 교수에 대한 ‘사법재판’에 앞선 ‘여론재판’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 것이다. 사실 그것은 송 교수만이 아니라 그동안 ‘국가보안법’의 부당성에 저항하며 ‘전향’을 거부했던 수많은 ‘미전향 장기수’의 삶을 모두 부정하는, 엄청난 ‘자가당착’이었다.

후일담도 속편도 아닌 ‘우리’ 이야기

이 ‘냉철한 선택과 집요한 응시의 영화’가 탄생하는 데는 무려 6년의 시간이 걸렸다. <경계도시2>는, 송두율 교수가 한국에 체류하는 3주 동안 그의 뒤를 따르면서 ‘철학자 송두율의 눈에 비친 한국사회’를 담아보자는, 비교적 가벼운 기획으로 출발하였다고 한다. 예상과 달리 송두율 교수는 한국에 11개월 동안 머물러야 했고, 그 11개월을 담은 400여개의 테이프는 6년 동안의 길고 지난한 산고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한편의 영화로 태어날 수 있었다(“태풍의 시간을 통과한 뒤에 시간을 가져야 했다. 편집기에 앉아 화면을 응시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덮어버리거나 외면하고,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갈등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영화는 애초의 기획과는 달리, ‘철학자 송두율의 눈에 비친 한국사회’가 아니라, ‘송두율 사건을 통해서 되돌아보는 한국사회’를 담아내게 되었다. <경계도시2>는 망각 속에서 희미해져가던 ‘송두율 사건’을, 지금/여기에서 우리 모두가 직면해야 할 ‘거대한 질문’으로 바꾸어놓는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경계도시2>(2009)는 <경계도시>(2002)의 ‘후일담’이나 ‘속편’이 아니다. <경계도시>의 주인공이 ‘33년 만의 귀향에 실패한 송두율’이었다면, <경계도시2>의 주인공은 ‘한국사회에 살고 있는 수많은 우리’이기 때문이다. <경계도시>는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일상적인 행위조차 ‘결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당부 또는 경고로 끝을 맺고 있다. <경계도시2>는 “2003년 송두율은 스파이였고, 2009년 송두율은 스파이가 아니다. 그때 송두율의 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으로 끝이 난다. 그 질문은 몇년 전의 ‘송두율 사건’에 대한 ‘회고적 질문’이 아니라, 정확히 ‘지금/이곳에 있는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사실 송두율은 사법적인 의미에서의 ‘죄’(crime) 때문에 심판받기 이전에, 우리 모두가 가담한 ‘여론재판’에 의해서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죄’(sin)를 저지른 파렴치한이 되었다(‘노동당 입당 사실을 미리 말하지 않은 거짓말쟁이’ 등). 과연 이러한 메커니즘이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더이상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경계도시2>가 다루는 시간은 결코 ‘과거’가 아니며, 이 영화의 주인공은 결코 ‘송두율 교수’가 아니다.

침묵의 저항, 침묵의 말

<경계도시>에서 송 교수는 많은 ‘웃음’을 보여주고, 그만큼 많은 ‘말’을 한다. <경계도시2>에서 송 교수는 어느덧 ‘웃음’을 잃고, ‘말’을 잃는다. 하지만 <경계도시2>에서 나타나는 송 교수의 ‘굳은 표정과 침묵’은 이미 ‘저항’이었고 ‘말’이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경계인’이라는 개념에는, 도덕을 강요하는 모든 이분법적 ‘경계’(벽 또는 척도로서의 경계)에 대해서 저항하고자 하는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고민과 시도가 담겨 있는 것이었지만(‘대립하는 두 가지가 서로 섞이고 공존할 수 있는 지대로서의 경계’), 한국사회에는 그 시도에 담긴 ‘거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경계도시2>는 이제라도 그 ‘거대한 질문’을 듣자고 제안한다. 우석훈의 말처럼, <경계도시2>는 ‘철학자가 철학을 하지 않는 사회’에서 ‘철학보다 먼저 움직이는 예술’의 존재를 증명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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