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소년 소녀의 지구는 일기와 편지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어딘가에 일기와 편지에 쓰인 일들이 일어나는 가상우주가 있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매일 소풍을 가거나 가족과 외식을 했다. 요즘처럼 실시간으로 트위트와 리트위트를 반복하는 시대라면 코웃음칠 펜팔이라는 문화는 어땠나. 매일같이 우리는 묻고 또 물었다. 하우 아 유?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자문자답. 아임 파인 땡큐. 우표 수집을 취미로 갖지 않은 아이가 없었고, 정 할 말이 떨어지면 <펜팔 예문집>에 나온 남의 일상을 베끼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때 그 일이 좋다 아니다를 말하자는 건 아니다. 다만 가끔은 몹시 그리워진다. 글이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나만의 가상현실.
<연애편지의 기술>을 보면 소싯적 편지 한통으로 지구를 정복할 기세였던 지난 세기의 몇몇 순간이 떠오른다. 편지는 소통이라고 배웠는데 사실 대부분은 혼잣말이고 넋두리였다. <연애편지의 기술>에서 편지를 쓰고 있는 모리타 이치로는 그런 혼잣말의 달인이다. 교토에서 살던 그는 실험소 외엔 아무것도 없는 고독한 노토 바닷가로 가게 된다. 해파리를 연구하러. 그는 고독을 이기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과 편지 왕래를 시작한다. “이 무사수행과도 같은 편지왕래가 나의 필력을 월등하게 높여줄 것이다. 그리고 훗날 ‘연애편지 대필’ 벤처 기업을 설립하여 대박을 터뜨릴 것이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부터 주인공의 맨 정신이 제정신은 아님을 확신케 하지만 여튼 그는 편지를 열심히 쓰고 보내고 받는다. 꽤나 진지하게 신세한탄을 늘어놓는 걸 읽고 있자면, 주성치식의 비장미를 느낄 수 있다(참고로 자신이 10년 전 쓴 편지를 다시 읽어보라, 마찬가지의 비장미에 “아이고 배야!”라며 방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며 웃게 될 것이다). 심지어 주인공은 소설가 모리미 도미히코(이 책의 저자 말이다)와도 서신왕래를 하는데, 그에 대해 여동생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조심해. 모리미씨는 나쁜 사람이거든. 인축무해인 척하며 교묘한 말로 처녀 독자들을 홀리게 하여 일본 전국을 타고 앉아 사랑의 불장난에 빠져 살고 있지. 덕분에 원고마감일도 지키지 못한다더라. 그러니 그런 인물의 책을 읽는 것은 별로 권장할 생각이 없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때문에 모리미 도미히코를 좋아하고는 있었는데, 이 책으로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이 미친 유머감각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