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opsis 제주도의 한 소학교. 완력을 휘두르며 급우들을 수하 부리듯 했던 형석이 갑자기 사라진다. 교실은 잠시 온기를 되찾지만, 이내 형석에게 눌려 살았던 도진(육동일)과 민구(이승민)는 패를 규합해 사사건건 으르렁거린다. 한편, 뭍에서 전학 온 동일(김두진)은 도진에게 접근해 신임을 얻은 뒤, 서연(한이빈)의 마음을 얻으려면 급장이 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민구를 완전히 짓밟아야 한다고 이간질한다. 도진과 민구의 싸움은, 동일이 끼어들면서 되돌릴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하난 확실해. 너 때문에 싸우는 거야.’ <꽃비>의 포스터에는 다소곳하게 책을 읽고 있는 소녀, 그리고 소녀를 동시에 바라보는 두 소년이 등장한다. 어떤 정보도 없다면, <친구> 혹은 <말죽거리 잔혹사>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꽃비>의 까까머리 청춘들은 순정을 증명하기 위해 까만 교복을 풀어헤치고, 주먹을 날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서연을 사이에 둔 도진과 민구의 패싸움은 학원청춘물의 흔한 삼각구도를 빌려 진행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꽃비>는 열일곱, 품행제로 청춘들의 치기어린 첫사랑 회고담이 아니다. 영화 속 제주도 방언들이 익숙해질 때까지도 가슴 시리거나 알콩달콩한 로맨스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도진과 민구는 서연을 왜 좋아하는가. 서연은 도진과 민구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가. 동일 또한 서연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건가. 삼각구도의 기본적인 감정은 확인이 쉽지 않을 정도로 휘발되어 있다. 다만, 반장이 되기 위한 세 남자의 전쟁만이 전경화되어 있다.
<꽃비>는 50여년 전 제주 ‘4·3 항쟁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다, 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정종훈 감독은 자신의 단편 <섬의 노을>(2000)을 원작 삼아 <꽃비>의 얼개를 만들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남과 북, 미국과 일본이라는 세력에 일대일로 대응한다. 도망치듯 섬에서 빠져나간 형석, 힘을 얻기 위해 비열한 수법도 가리지 않는 도진, 형석을 닮아가는 도진에게 맞서는 민구, 초콜릿과 포르노 잡지를 던져주며 친구들을 포섭하는 동일, 이들에 의해 짓밟히는 서연은 역사를 고스란히 투영한 결과다.
역사를 환기하려는 시도는 용기있다. 그러나 역사를 불러들이는 방식은 좀 촌스럽다. 폭도로 몰린 양민들의 시체 더미 속에서 울고 있는 어린 서연을 통해 영화 속 현재를 1950년대 후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잠들지 않는 남도’의 숨겨진 역사를 드러내기에 <꽃비>의 교실은 현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또 하나의 과거가 아닐까. 역사를 영화 속 인물에 고스란히 이식한 것도 지나친 단순화다. 장편영화에 첫 출연한 배우들이 대부분이지만, 그중 육동일은 낯익다. <한지붕 세가족>에서 최주봉의 아들, 장만수로 나온 아역배우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