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라시 유미코의 <캔디 캔디> 7권, 캔디는 스잔나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간다. 스잔나는 조명기가 떨어지는 사고에서 테리우스를 구하는 대신 자신의 다리를 잃었다. 캔디는 스잔나를 보면서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간절한지 깨닫는다. 그때 테리우스가 나타난다. 테리우스는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가는 캔디를 와락 ‘백 허그’한다. 그 순간 캔디가 뇌까린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초등학교 5학년 때 문방구에서 샀던 <캔디 캔디>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훗날 다시 출간된 버전에는 “그냥 이대로 시간이 정지해버렸으면 좋겠다”고 번역돼 있지만 감흥에선 많이 처진다. 30년이 지났는데도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이라는 구절이 생생한 것은 캔디의 그 뇌까림이 그만큼 절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인 듯하다.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 <지붕 뚫고 하이킥!> 마지막회에서 세경이가 말했을 때 전율을 느꼈다. 시간이 멈추기를 바라는 세경의 바람은 김혜리가 적은 대로 “가난과 책임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짊어지고 홀로 걸었던 소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소원이었으니 얼마나 절실했을 것인가. 한동안 지훈이 세경을 바라보는 정지화면과 함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건 스미스의 명곡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였다. “제발 제발 제발/ 제가, 제가, 제가/ 원하는 것을 갖게 해주세요/ 이번에는”이라는 가사가 머리 안에서 계속 도돌이표를 찍으며 세경의 소망을 곱씹게 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엔딩을 둘러싼 거대한 논쟁에 끼고 싶진 않지만, 결국 김병욱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세경이었던 것 같다. 이 비극적인 결말은 그 간절한 소망에 화답하기 위해 마련된 파국이 아니었을까.
하여간 시트콤 하나가 이토록 뜨거운 논쟁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놀랍다. <추노>의 결말 또한 많은 시청자를 충격에 빠뜨릴 것이고 어느 정도의 논란도 벌어질 것이다. 몇년 전만 해도 TV는 이 정도까지 담론의 중심에 오지 못했다. 간간이 화제와 이야깃거리를 만들었지만 최근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충격파를 던지지는 않았다. 이번 특집기사는 영화계가 이 활력을 떠안아야 하지 않겠냐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그렇다면 TV의 활력은 계속 유지될 것인가. 아직은 글쎄요, 일 수밖에 없다. ‘큰 집’, ‘조인트’ 같은 음험한 이야기나 <명가> <부자의 탄생> <전우> <자이언트>처럼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듯한 드라마 소식을 듣노라면 TV의 미래를 낙관하긴 어렵다. 차라리 더 나빠지기 전에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