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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살며 실패하며 배우며

한 소녀의 혹독한 인생수업 <언 애듀케이션> 속 교양과 교육의 문제

<언 애듀케이션>(An Education)은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샬롯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를 레퍼런스로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는 초반 시퀀스에 이를 밝히고 있다. 문학 수업 중 주인공 제니(캐리 멀리건)가 <제인 에어>에 관한 선생님의 질문에 손을 들고 정답을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의 의미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부유한 연상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연하의 여자’라는 설정은 두 작품의 공통점이다. 사랑의 열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여주인공의 성격도 비슷하다. 시대가 다른 만큼 차이가 있지만 심층에서 영화가 소설을 변주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제인’과 ‘제니’라는 이름이 환기하는 차이만큼 간극을 두고 두 작품은 마주보고 있다. 가장 큰 차이는 결말이다. <제인 에어>가 현실에서 출발해 낭만적 사랑으로 매듭지어졌다면, <언 애듀케이션>은 낭만적 사랑의 허울이 벗겨지고 현실이 드러나는 결말을 보여준다. 고용주와 가정교사라는 계약관계로 만난 제인과 로체스터는 온갖 역경을 딛고 낭만적 사랑을 완성하지만, 우연한 만남으로 낭만적 사랑의 첫 단추를 채운 제니는 배신감과 씁쓸한 현실을 직면하며 첫사랑의 막을 내린다. 실연과 성장이라는 친숙한 주제에다 예상에서 거의 빗나가지 않는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언 애듀케이션>이 진부함에서 비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제인 에어>를 비롯해 무수한 지적 레퍼런스들이 영화의 서사적 단조로움을 메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양’이라는 단어로 압축할 수 있는 이런 레퍼런스들은 단지 소재 차원으로 소비되는 게 아니라 영화 전체 서사와 조응하며 중심 스토리의 빈곤을 상쇄시키는 역할을 한다. ‘교양’이라는 단어와 함께 이 영화의 또 다른 키워드는 제목에 드러난 ‘교육’이다. 영화에서 ‘교양’은 사건의 매개체로 활용되고 ‘교육’은 주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로체스터가 눈이 멀었다”

1950년대의 고리타분 공기가 아직까지 대기를 덮고 있던 1961년 런던 시내 외곽, 옥스퍼드 진학이 목표인 모범생 제니는 첼로 연습을 마치고 퍼붓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때 럭셔리한 브리스톨 자동차가 제니 옆으로 다가오고 창문이 내려간다. 선한 인상에 잘생긴 아저씨는 ‘음악 애호가’로서 첼로가 비에 젖는 것이 걱정되니 첼로만이라도 차에 실을 것을 제안한다. 치한으로 몰리는 위험과 첼로 도둑이라는 오해를 감수하고 한 제안임을 설명하는 그의 언변에는 유머러스함과 세심함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일찌감치 그에 대한 경계를 풀어버린 제니는 첼로를 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도 차에 오른다. 제니와 데이빗(피터 사스가르)의 연애를 이끄는 원동력은 ‘교양’이다. 클래식 음악부터 재즈, 문학, 샹송, 회화에 대한 풍부한 교양은 둘에게 화제를 제공하고 교감을 이끌어낸다. 둘이 함께 있을 때 교양은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하지만 각자에게 교양의 의미는 다르다. 줄리엣 그레코, 사르트르, 카뮈 등 프랑스적 교양은 제니의 낭만적 동경의 현실 등가물이라 할 수 있고, 번 존스를 비롯한 라파엘 전파(前派)의 회화나 C. S. 루이스의 책 등 영국적 교양은 영화의 플롯을 진행시키는 구체적인 사물로 기능하고 있다. 우등생이지만 지루한 현실에 반항심을 갖고 있는 제니는 <이방인>을 읽고, <파리의 지붕 밑>을 들으며 정체불명의 감상을 해소하곤 한다. 소녀다운 낭만적 감상으로 데이빗에게 빠져든 제니는 여고생답지 않은 교양을 갖추고 있어 데이빗과 그의 친구를 매료시킨다. 현실과 결부되지 않은 지식 차원으로 존재하는 제니의 교양과 달리 데이빗에게 교양은 돈을 버는 현실적 수단이다.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예술품을 경매로 사들이거나, 순박한 사람들이 소장한 골동품을 헐값에 사들이는 것이 데이빗과 친구의 재테크 방식이다. 교양이 이를 위한 필수전제임은 당연하다. 백인 거주 지역의 집을 사들여 흑인에게 세를 주면서 데이빗은 인도주의자로서의 교양을 들먹이지만 실상은 백인들이 싼값에 집을 팔고 떠나길 유도하는 사업전략이다.

제니와 데이빗의 연애의 종말은 참담하다. 결혼을 위해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학교도 자퇴한 제니는 데이빗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데이빗의 실체는 부유한 친구 옆에 기생하며 교양을 파는 상습적 바람둥이인 것이다. 이 글의 처음이자 영화의 서두로 돌아가 <제인 에어>에 관한 제니의 답을 생각해보자. “로체스터가 눈이 멀었다”는 것이 제니의 답이었다. <언 애듀케이션>과 <제인 에어>의 친연성과 변별성을 동시에 설명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특히 전혀 다른 결말을 암시한다. 유부남이었던 로체스터와 제인은 법적, 도덕적으로 결합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미친 아내를 구하기 위해 실명한 로체스터는 법적, 도덕적으로 제인과 결합할 수 있는 신분으로 바뀐다. 실명은 불행이지만 사랑의 장애를 극복하는 계기로써 해피엔딩을 마련한다. 즉, 실명은 자신의 허물을 구속(救贖)하는 방식이다. <언 애듀케이션>에는 그런 반전이 없다. 데이빗은 유부남이면서 소녀를 유혹한 파렴치한 남자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한다. 데이빗은 악한인가. 영화에서 데이빗은 자신의 허물을 구속할 기회를 한번 얻는다. 데이빗의 정체를 알게 된 제니가 자신의 부모에게 직접 잘못을 고백하라고 종용한다. 고백은 반성과는 달리 상징 언어로 자신의 체험을 표현하는 것이다. 제니와 그녀의 부모에게 데이빗이 할 수 있는 속죄의 방식은 고백이 유일하다. 하지만 데이빗은 고백의 자리에서 도망친다. 고백을 하게 되면 데이빗은 그동안 스스로를 유지해왔던 자기 동일성을 무너뜨리게 된다. 아마도 데이빗은 바람을 피워오는 동안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합리화를 해왔을 것이고 교양을 이용한 돈벌이에도 그럴듯한 변명을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데이빗은 고백으로 인한 자기 소외를 견딜힘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기 때문에 현실을 회피하는 것으로 곤경을 모면하며 사는 유형의 사람이다. 반대로 제니는 데이빗의 정체와 초라한 현실을 깨닫고 현실과 당면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원제 ‘An Education’에서 ‘An’이 의미하는 바

실연은 제니라는 소녀의 순수한 정체성에 흠집을 냈다. 그러나 제니의 흠집은 데이빗의 허물과는 다르다. 제니의 흠집은 자초한 면이 있지만 외부에서 기인한 불행이다. 제니가 이 불행과 고난을 극복하는 단계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교육’이라는 주제가 개입된다. 여기서 교육은 단지 학교라는 제도권에서 이루어지는 절차와 결과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차원적으로 보면, 하라는 공부 제때 안 하고 한눈팔면 인생 곤두박질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게 이 영화의 교훈처럼 생각된다. 이 말도 틀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게 정답도 아니다. 제니는 데이빗의 아내를 만난 뒤 미련을 확실히 끊어내고 엉클어진 인생의 갈피를 추스르기 시작한다. 교장과 문학 선생님을 찾아가서 복학할 방도를 찾고 다시 학업에 열중하여 이듬해 본래의 목표였던 옥스퍼드에 진학한다. 원래 우등생이던 제니였으니까, 우수한 제자를 아끼는 선생님의 배려가 있었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수 있다.

영화의 제목을 ‘어떤(하나의) 교육’ 정도로 해석한다면, 제니가 겪은 모든 일은 결과적으로 그녀를 교육시켰다는 것으로 제목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고급 레스토랑과 우아한 음악회, 멋진 주말여행에 취한 제니는 위험을 경고하는 교장에게 “왜 교육이 필요한 거죠?”라고 당돌한 질문을 던진다. 데이빗에 대한 사랑과 빨리 눈뜬 어른의 세계에 흠뻑 빠져 있던 제니는 “교육은 의미”라는 교장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때 제니는 세상의 겉모습만을 보고 있다. 제니에게 옥스퍼드는 안경 낀 못생긴 여학생들이나 다니는 답답한 곳이고, 데이빗이 펼쳐 보여준 세상은 낭만과 자유가 넘실대는 신세계였던 것이다. 세상은 겉모습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깨달은 제니는 자기 발로 옥스퍼드라는 교육 현장으로 돌아간다. 학교 밖 교육을 통해 교육의 의미를 깨닫고 학교 안 교육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제니의 경우는 이렇지만 모두가 이런 절차를 밟을 필요는 없다. 정답은 없다. 그래서 제니의 경험은 ‘하나의’(an) 예일 수밖에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교육’이라는 화두에 정답이 있다면 우리 사회가 교육문제로 이토록 골머리를 앓고 있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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