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는 잡음이 많아요. 소란스럽죠. 서로 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다툼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하는 묘한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3개월간 영화계 인사들과 소통하면서 느낀 점은 서로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이견을 극복할 수 있는 저력도 있다는 것입니다.”(2009.12.22, <연합뉴스>)
“영화계는 물론 문화계 전체, 정부에까지 불신받고 신뢰가 무너진 상황을 복구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영진위가) 제대로 일한다, 영화판을 제대로 돌아가게 한다, 이런 평가를 끌어내는 게 중요했죠. 생각보다 빨리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아 내심 자신감도 생겼습니다.”(2010.1.10, <서울신문>)
무지인가, 아니면 호도인가. 조희문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위원장의 근거없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는 불과 두달 뒤 벌어질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덮어두고 싶었던 것일까. 그 어느 쪽이든, 영진위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명명백백하다. 조 위원장이 영진위 위원장 직을 맡은 지 불과 6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무려 1700명이나 되는 영화인들이 영진위의 ‘제멋대로’ 사업 진행에 쓴소리를 뱉었다. 3월16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영화진흥위원회 정상화를 촉구하는 영화인 1천인 선언’ 기자회견은 1999년 영진위 출범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성토장이었다. 위원 구성 등의 내홍을 겪었던 1기 영진위(1999~2002) 시절에도, 단체사업지원 등 해당 사업에 대한 일부 영화계 단체들의 문제제기가 더러 있었으나, 지금처럼 많은 영화계 인사들이 나서 한목소리로 “영진위의 비민주적이고 비문화적인 독단적 행정 집행”을 질타하진 않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현재의 거센 반발 기류를 감안할 때 영진위가 신뢰 회복을 위한 반전의 기회를 찾기는 좀처럼 쉽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강한섭 위원장 시절 때까지만 해도 “일단은 신중하게 지켜보자”고 했던 영화인들까지 ‘안티 영진위’ 대열에 합류한 상황이다. 현 정부 들어 1년여 만에 위원장이 교체되는 수모를 겪었던 영진위는 조 위원장 체제 아래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제작자, 감독, 스탭, 학생 등 1692명 서명 참여
현장에서 발빠르게 정책을 구해야 할 영진위가 고립된 낙오의 섬이 됐음은, 3월16일 기자회견의 싸늘한 분위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청년필름 김조광수 대표는 “그동안 영화인 서명은 여러 번 진행해 왔으나 이번처럼 긴 설명 필요없이 서명받기 쉬웠던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기자회견 주최쪽이 공개한 1692명의 영진위 정상화 촉구 서명 명단에는 독립영화전용관, 영상미디어센터 공모를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앞장서 문제를 제기해왔던 독립영화인들 외에도 차승재, 봉준호, 허진호, 임순례, 최동훈, 김우형, 류승완 등 상업영화 제작자, 감독, 스탭이 포함되어 있으며, 전국 각 대학 영화 전공 학생들도 서명에 참여했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최진욱 위원장은 “현 영진위 사태는 좌우의 (이념) 문제가 아니라”며 “(영진위 정상화 촉구 서명에 참여한) 사람들 숫자를 보면 영화계 종사자 절반 이상”인데도 영진위는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변영주 감독도 “서명자 중 최근 5년간 영화를 제작한 대부분의 감독이 포함되어 있고 지금도 명단은 늘어나고 있다”며 “이는 영진위나 정부의 주장대로 영화계가 좌파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배우이자 감독인 방은진씨도 영진위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를 “영화인들의 세력 다툼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모 진행 및 결과에 대한 비판에 대해 영진위는 그동안 뚜렷한 해명없이 “정치적 왜곡”이라는 답변만 반복했다.
영진위를 향한 비난의 불길은 영화계 안에서만 타오르는 건 아니다. 340여명의 문화예술인들도 3월16일 성명서를 내고 “영진위의 이번 공모제는 객관성, 전문성, 투명성을 상실했”으며 이는 “오로지 정치적 이해관계를 충족시키기 위한 비리와 조작만이 난무했다”고 지적했다. 의혹은 누구나 제기할 수 있고, 영진위는 공모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면 된다. 그러나 조 위원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독립영화전용관 및 영상미디어센터 공모가 자의적, 편파적으로 진행됐고, 결국 해당사업에 대한 준비는 물론 이해조차 하지 못한 단체들이 최종 선정됐는데도 조 위원장은 “공모 절차에는 하자가 없다”는 식의 대응으로 일관했다.
예산 쓰지도 못하고 내줄 판
조 위원장의 해명처럼 “전문적인 심사위원들이 객관적으로 심사를 진행한 것일까”. 결국 이 문제는 법정에서 가려질 전망이다. 3월10일, 독립영화전용관 공모참여단체인 (사)인디포럼작가회의와 영상미디어센터 공모 참여단체인 한국영상미디어교육협회는 영진위의 2010년 해당사업 운영사업자 선정을 취소하는 내용의 행정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청구한 상태다. 한편, ‘촛불단체’로 찍혀 영진위의 단체사업지원에서 탈락한 인권운동사랑방과 인디포럼작가회의도 “지원금의 지원 취지와 하등 상관이 없는 단체의 활동이나 성격을 문제 삼아 지원금을 배분하지 않는 것은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영진위는 어쩌면 법적 공방이 시작되면서, 결과가 나오기까지 들끓어오른 여론이 식을 것이라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논란은 여타 사업부문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공모에 응한 단체가 아무도 없어 재공모에 들어간 시네마테크 사업이 대표적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직접 나서 종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아트시네마는 원칙없는 영진위의 시네마테크 사업 공모에 응하지 않을 계획이다. 일각에선 이러다가 영진위가 관련 사업에 책정된 예산을 쓰지도 못하고, 결국 내줘야 하는 상황을 맞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또한 한국영화아카데미를 “너무 엘리트화됐다”며 “영화인 재교육 사업 위주로” 운영하겠다는 조 위원장의 의지도 호된 여론의 포화를 맞고 있다.
문제는 영진위인가, 문화부인가
“매는 우리가 다 맞는다.” 강한섭 전 위원장 시절부터 현재까지 영진위 직원들의 끊이지 않는 푸념이다. 영진위는 이미 자율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영상미디어센터 및 독립영화전용관 공모사업의 경우 “심지어 보도자료 내용까지 일일이 문화체육관광부에 보고하고 확인받은 뒤 발표하는” 촌극이 계속되는 한, 영진위의 추락한 위상을 회복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떤 영화인이 정부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며, 어이없는 실책을 남발하는 영진위와 대화를 하려 들 것인가. 조 위원장은 교수 시절, 문화미래포럼의 이름으로 낸 ‘이념과 선동의 레드카펫을 걷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과거 영진위 위원들이 “사업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영진위 위원장이 된 지 6개월 만에 영화계 안팎에서 사퇴하라, 고 면박당하는 조 위원장은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