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에서 맴돌 땐 혐의가 없는데 뱉어지는 순간 제 말을 배신하는, 적어도 그 말의 실없음을 증명하는 말들이 있다. 가령 “저는 겸손한 사람입니다”라든지 “나 유명한 사람이야”. 정말 자신을 낮춘다면 굳이 남 옆구리를 찌르며 제 미덕을 자랑할 필요가 없겠고, 사람들이 그토록 알아본다면 제 유명세를 부러 누구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없겠지. 새벽에 전화해 “나는 이제 너를 잊었어”라고 말하는 지난 연인은 그 소식을 알릴 배터리 여분만큼 그대를 마음에서 남겨둔 것이고, 지인들에게 “나는 왜 이렇게 생겼지?”라고 투정할 수 있는 사람은 실은 자부심을 깔고 상대의 정색하는 반응(“너 예뻐!”)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집 가난해”라고 쉬 말할 수 있던 친구는 어느 정도 사는 집 자식이게 마련이었고, “나 이번 시험 망쳤어”, 얘기할 수 있는 학생은 그래도 평균 이상의 등수일 때가 많았다. 어쩌랴, 그렇게 우리의 하루를 지켜주는, 서로 알고도 모른 척해주는 작은 모순들. 약한 개인들이 속 편한 가장자리는 지키면서 그래도 나 좀 알아줬으면 할 때 써먹는 무해한 제스처들.
좀더 생계형의 역설도 있다. 가령 우리네 서비스가 제일 좋다며 고래고래 호객을 하는(특히 부산영화제 때 해운대) 횟집들은 정작 그 품질에 동의하는 손님이 부족한 현실을 공지하는 셈이고, 표지사진에 하얀 치아를 드러낸 채 ‘성공하는 사람들의 어쩌고’를 펴내는 젊은 CEO들은 알면 알수록 이력이 그닥 솔찮치 않은 경우가 많다. 어쩌면 이른바 섹스칼럼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우리는 사랑을 할 땐 사랑에 주석을 달 시간이 없다(저를 보세요, 영화를 만들고 있다면 영화잡지에 칼럼을 쓰고 있겠어요?).
‘公募’는 ‘共謀’로 ‘진흥’은 ‘진창’이 되는 순간
그러고보면 영화의 메시지와 스타일이 모순으로 충돌할 때도 많다. 예고된 살인을 막기 위해 주인공이 동분서주하지만 정작 그 살인의 묘사를 통해 관객의 향락- 히치콕과 봉준호가 현명하게 피하고 있는- 을 유도하는 영화들. 인명의 들고 남을 묘사하는 과업이라 공을 들였다기보다는 그 순간을 장식하는 재주를 과시하기 위한 포트폴리오들, 이택광 선생식으로 말하자면 ‘서사의 무덤 위에 새겨진 묘사라는 비문’들(여기서 좀비물 등등은 예외로 해두자. 이 장르들은 애초에 젠체하는 가치에 복무하고 있지 않기에 무해하다).
하나 힘세고 못난 사람이나 집단들이 현실에서 이런 ‘말 아닌 말’, ‘말을 배신하는 말’에 맛 들리면 공공에 민폐가 된다. 일단 끌어들이는 창과 방패가 커지면서 그 부작용이 커지게 마련. 취수장에서 퍼올린 물을 인공적으로 돌리는 콘크리트 어항을 놓고 생태 기적이라 자찬한다든지, 광화문 차도에 커다란 화분을 늘어놓고(밭하게 경찰도 세워놓고) 시민을 위한 광장이라 부른다든지. 그렇게 ‘생태’는 ‘생색’의 다른 말이 되고 ‘실용’은 ‘실성’의 가림막이 된다.
슬프게도 요새 이런 형용모순들이 이 나라의 영화 관련 정책을 결정하는 마당에서 넘쳐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파라 자처하는 이들이라면 차라리 시장경쟁- 제작이든 저널이든 마케팅이든 담론이든- 에 열심히 뛰어들어 자신들의 가치를 입증하면 될 터인데, 스스로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실은 누구보다 ‘좌파 빨갱이’의 사고방식들을 내장하고 있으면서 그간 은폐해온 것인지(참고로 나는 지극히 실용적인 중도우파 파랭이다) 뒤늦게야 이른바 ‘공공의 영역’에 관심들을 두고는 서로 한 자리 차지하려 난리들이다. 시네마테크의 효용을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시네마테크를 공모에 붙이려 하고, 미디어교육의 미래를 운운하는 위원들이 연초 급조된, 아니 심지어 제대로 급조되지도 못한 단체에 미디어센터의 운영권을 넘긴다. 이런 걸 5음절로 기획부동산이라고 하던가. 그렇게 ‘公募’는 ‘共謀’가 되어가고 ‘진흥’은 ‘진창’이 되어간다. 반대로, 시장 바깥의 가능성을 사고하던 이른바 ‘진보’나 ‘독립’들은, 스스로를 ‘우파’라 칭하는 이들의 정작 ‘서툰 빨갱이’ 짓거리를 피해 오히려 ‘시장’에서 은신처를 마련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연출된다. 이 묘한 패턴은 앞으로 더 자주 반복될 것이 분명하기에 좀더 각 잡고 분석할 필요가 있을 성싶다.
이런 일련의 증상들을 최근에 진중권 선생이 프로이트를 빌려 정리해놓은 문장이 있다. “그것은 끈적끈적한 물질적 욕망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대권과 공천권이 그들의 ‘이드’이고, ‘국가의 백년지대계’니 어쩌고 하는 수사법은 이 본능적 욕구를 정당화하는 슈퍼에고의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얘기죠.”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쏟아지는 여당의 언술을 겨냥한 말이지만 위에 언급한 상황과 배후의 욕망들을 설명하기에도 싱크로율은 높다.
본능적 욕구를 정당화하는 헛소리에 불과해
아, 그러나, 그런데, 그렇기에, 고백하자면 무엇보다 지금 이 지면의 말들이야말로 내 속의 말을 배반하고 있다. 원래는 그저 소승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었으니까. 우리 인생과 연애와 또 다른 관계에서의 숱한 창과 방패들,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닌 인생 행보에서 조금 해로울 수도 있는 역설들 말이다.
가령 결혼을 과도하게 서두르는 커플은 아직 서로에게 확신이 없을 때가 많고, 신앙을 깊게 파고들기 싫은 신자일수록 통성으로 기도하길 선호한다는 사실들. 남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싶을 때 그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멘트를 자주 화제로 올리고, 기득권을 조롱하는 글발을 무늬 바꿔 전시하며 실은 그 질서의 자산이 되어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들. 닿아 있는 커뮤니티가 위기에 처할 때 되레 제 인정투쟁의 기회가 온 걸 직감하고(그 구성원들의 구체적인 고난은 잠깐 생략하고) 반짝 생기가 도는 우리의 눈빛들까지. 나는 자수한다.
뭣보다, 나랑도 하고 싶고 쟤랑도 하고 싶어 하던 존재에 치인 환부를, 이번엔 내 편에서 일부러 긁어가며 다른 향락의 동기로 삼고 싶어 하는 모순들. 그래서 건드릴 수 있는 모든 걸 물고 빨고 씹고 부수고 풀었다 말았다 죽였다 살렸다 싶어 하는 순간들. 그렇게 붕 들떠버린 심신의 욕망을 문답없이 누리고 싶을 때 그런 자신에게 일시정지를 누르려는(진부하지만 정든 네 자리로 돌아가라 명하는) 이성을 피하기 위해, 그러니까 에고를 이기기 위해, 오히려 그전까지 *까라 마이싱 정도로 생각하던 대의명분들- 솔직히 그닥 신뢰하지 않던 가치들- 로 달려가 슈퍼에고 역할을 위임하는 우리. 결국엔 그 명분들에 되레 선택을 저당잡힌 채 내 욕망도 아닌 욕망을 포장해 나눠주는 가판대에 줄을 서는 연인들. 그렇게 너와 내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헤어지거나 만날 때의 패턴들(미워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헤어지기 위해 미워하는, 사랑해서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나기 위해 사랑하는).
그런데, 제기랄, 그 속내를 얘기하기 전에 짚고 넘어갈 말들이 이렇게 많아졌다. 평론가 남다은이 말했던 것처럼(742호 C그라운드 첫 페이지) ‘단지 그 자리에 있기 위해 그 자리를 지킬 말부터 해야 하는’ 상황인 거다. 말이 되는 말에 기대고 싶고 변명 아닌 말, 말을 속이지 않는 말을 하고 싶다. 아직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