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슬라이스>, <10월의 소나타>, <방콕 트래픽 러브 스토리>, <유령붙은 대학>
2009년 마지막 세달 동안 개봉한 네편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지난해는 타이영화 최악의 해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이 영화들의 남자주인공들은 대체로 지루하고 수동적이지만, 재미있는 여자주인공들이 나온다는 점에서는 다른 영화와 좀 다른 구석이 있다. 극단적인 아트영화나 액션과 공포영화 수출로 유명한 타이영화계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들은, 타이영화의 독특한 브랜드인 로맨틱코미디, 청춘영화와 묵직한 스릴러영화들이다. 피 흘리는 장면이 많지만 모두 멜로드라마이기도 하다.
지난해 박스오피스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보여준 영화는 10월 중순에 개봉한 로맨틱코미디 <방콕 트래픽 러브 스토리>다. 만년 싱글인 서른살 리는 가장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서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해 차 사고를 낸다. 할 수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된 그녀는 고가전철 엔지니어와 사랑에 빠진다. 미래에 대한 아무 전망도 없는 리는 불안정하고 약간 멍청하다. 하지만 언제나 꿈꾸던 남자를 얻으려는 그녀의 노력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대단한 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랑을 놓고 겨루는 어린아이 같은 라이벌을 포함한 여자주인공들이 사랑스럽다.
이보다 일주일 늦게 개봉한 <유령붙은 대학>은 기억에 남을 만한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두 감독의 영화 만드는 솜씨가 워낙 좋아서 불을 켜고 영화를 보고 싶을 정도로 강렬하고 무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모든 공포영화 감독들이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 영화는 대학생들이 나오는 전형적인 도시 귀신 이야기를 다루는 단편영화 모음이다. 모든 이야기는 죽은 사람을 볼 수 있는 앰뷸런스 종사자와 일하는 한 젊은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 느슨하게 연결된다. 그러나 이 영화의 불행이라면 훨씬 더 인상적인 공포스릴러영화와 같은 날 개봉했다는 것이다.
콩키아 콤시리의 <슬라이스>는 타락한 경찰을 위해 감방 동료를 죽인 젊은 수감자에 대한 이야기다. 방콕에서 연쇄살인범이 출몰하는 가운데, 그는 토막낸 사체를 붉은색 슈트케이스에 버린 살인범의 프로파일에 맞는 유년 시절의 친구를 찾아내기 위해 15일간의 자유를 부여받는다. 역겹고 소름끼치는 이 영화는 성기 절단과 가상의 난교 파티에서의 끔찍한 집단학살 장면으로 타이의 새로운 검열 시스템의 한계를 의도적으로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러나 이 영화가 유년 시절의 플래시백 장면에서 마술적이고 시적인 멜로드라마로 옮겨갈 때, 그 갑작스런 전환은 스크린에 대고 환호를 지르고 싶을 만큼 성공적이다.
지난해의 대미를 장식한 특별한 영화는 솜키앗 비르투라니취의 아름다운 영화 <10월 소나타>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민주화 운동을 하던 젊은 남자와 (섹스없이)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세상의 새로운 가능성에 눈뜬 젊은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멜로드라마다. 그들은 그가 미국에서의 공부를 끝낸 2년 뒤 같은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에게 감명을 받은 그녀는, 그를 기다리는 동안 스스로 읽기를 배운다. 그러나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만, 그녀의 남편도 모든 이야기를 아는 가운데 매해 10월 같은 호텔로 돌아온다. 그들은 단 며칠간을 같이 지냈지만 이 마술적인 영화는 우리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얼마 안되는 운명적 만남을 담아낸다.
<님프>와 <6월의 한순간>처럼 잘난 체하는 지루한 영화들을 제치고 <슬라이스>와 <10월 소나타>가 올해 타이의 각종 영화상을 휩쓰는 것을 보고 나는 짜릿한 전율감을 느꼈다. 타이는 최근 영화 <일상적 역사>처럼 조용하고 인상적인 아트영화뿐만 아니라 독특하고 시적인 상업영화를 만들어내는 아시아 국가로 인정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