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제작된 영화 <어느 북한의 모험, 모란봉>(Moranbong, une aventure cor?enne)은 프랑스영화 중에서도 가장 두터운 베일에 가려진 작품 중 하나로, 유명 작가 아르망 가티가 시나리오를 쓰고 지금은 잊혀진 장 클로드 보나르도가 영상을 맡았다. 북한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제작한 이 유일한 작품을 최근 파리에서 열린 ‘세계와 영화의 현황’이라는 페스티벌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영화는 한국전쟁이 한창인 당시 남한에 속했던 개성시에서 시작된다. 가구 세공 일을 하는 한 젊은이가 아리따운 판소리 가수를 좋아한다. 전쟁이 끝났을 때 젊은이는 남쪽에 머물고 있었는데 개성시는 그만 북쪽 차지가 되고 만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비무장지대를 헤엄쳐 건너가고, 결국 사랑하는 여인을 평양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모란봉 고지에 있는 명망 높은 대극장에서 춘향이 역을 맡고 있었다.
대사는 한국어로 구사되고 불어가 화면 밖 목소리로 깔려 들리는 이 영화에서는 폭탄으로 페허가 된 평양시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배경으로 사용하는 등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병용하고 있다. 영화 끝부분에서 평양시의 재건축이 시작되는 기미와 그 구체적인 첫 단계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어느 북한의 모험, 모란봉>은 북한이라는 나라가 처음부터 아시아 대륙의 못난 절름발이 나라가 아니었음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950년대 말 북한은 오히려 활기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나라였다. 물론 그건 소비에트연방의 지원 덕분이기도 했지만 북한 국민 덕이기도 했다. <어느 북한의 모험, 모란봉>은 그런 북한 국민한테 영예를 돌려주려는 의미로 만들어진 영화다.
프랑스에서 <어느 북한의 모험, 모란봉>은 검열 분쟁으로 특히 알려져 있다. 처음 보나르도 감독과 시나리오를 썼던 가티는 그냥 단편영화 하나를 만들 생각이었다. 한데 막상 현지에 도착해보니 북한 당국이 촬영 허가는 물론 생각지도 않았던 장비와 엑스트라에 배우까지 전격 지원해주었고, 결국 두 사람이 생각했던 프랑스 단편영화는 거의 절반은 북한 제작인 장편영화로 탈바꿈하게 된다. 프로듀서 마르셀 드글리암은 1959년 10월13일 북한 CNC(북한 영화진흥위원회에 해당) 회장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북한과 프랑스 사이에는 어떤 협약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공동제작에 관한 아무런 협약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작품은 북한과 프랑스의 공동제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에 저희는 북한 영화진흥위원회가 이 작품을 프랑스 제작물로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렇게 해서 드글리암은 이 작품에 프랑스 국적을 획득하게 되는데, 이게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을 선고하는 것이었음을 드글리암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어느 북한의 모험, 모란봉>이 완성되자, 이번엔 프랑스 정부로부터 배포 허가를 거부당하게 되었으니 말이다(프로덕션은 뒤늦은 1962년에야 작품의 배포 허가를 받게 된다).
당시 프랑스 홍보부 장관은 제작사에 편지를 보내 단호하게 질책했다. 이유인즉 연합군이 북한 극장에 폭탄 세례를 퍼붓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것, 또 한국 군인이 입고 있던 미국 군복을 벗어 땅에 던지고 짓밟는 장면을 다큐멘터리 자료를 통해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결국 문제는 공식상 <어느 북한의 모험, 모란봉>의 국적이 프랑스였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가 프랑스 작품이라는 점에서 볼 때 프랑스의 외교정치상 물의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특히 한국과의 외교관계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작품의 배포 허가 및 수출을 승인하지 않았다”고 홍보부 장관은 편지를 끝맺었다. 이에 당시 꽤 영향력이 있었던 공산주의 성향의 한 언론은 그러한 결정은 표현의 자유에 명백하게 위배된다고 고발 조치했다. 결국 홍보부쪽이 양보하게 되어 1963년에 드디어 금지조치가 풀린 것이다. 우여곡절 5년 만에 <어느 북한의 모험, 모란봉>은 몇몇 극장에서 조심스레 상영되었고, 이후 50여년 동안 사라져버렸다. 이번 파리 페스티벌 기획자들이 다시 작품을 찾아낸 영화기록보관소의 망각 속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