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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여름이 떠나면 가을이 올거야

사랑과 일이 변증법적으로 지양되는 남성 성장의 공식 보여준 <500일의 썸머>

소년이 남자가 되기 위해서 찾아야 할 두 가지는 무엇일까? 귀엽고 재기발랄한 로맨틱코미디 <500일의 썸머>는 짝(여자)과 일(직업)이라고 답하고 있다. 로맨틱코미디는 남성보다 여성이 선호하는 장르지만 이 영화만큼은 남성이 더 공감할 만하다. 대부분의 로맨틱코미디에서 시선의 주체는 여성이지만 이 영화는 남성의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 이는 단지 남자주인공을 내세웠기 때문이 아니라 <봄날은 간다> <질투는 나의 힘> 같은 남성 성장 멜로드라마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마크 웹 감독은 이렇게 장르의 관습을 살짝 비틀어 인상적인 데뷔작을 완성했다. 사랑과 이별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남자가 주인공인 로맨틱코미디가 있었던가? 여성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 남자가 그동안 몰랐던 여성의 내면을 이해하게 되는 <왓 위민 원트> 정도가 근접한 주제를 갖는 영화로 물망에 오른다. 감독은 서두의 내레이션을 통해 이 영화가 뻔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고 ‘한 소년이 소녀를 만난 이야기’라고 강조한다. 사실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다. 그런데 굳이 이런 방점을 찍어놓은 것은 관객의 통념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다. 아마도 감독이 생각하는 ‘뻔한’ 사랑 이야기는 고난과 갈등을 극복한 커플이 결합하는 해피엔딩이나 <러브 스토리>처럼 비극일지언정 죽음으로 완결되는 낭만적 사랑의 신화를 구현하는 이야기라고 추정된다. 이런 가정 아래 앞에 언급한 내레이션을 풀어보면 이 영화는 커플이 결합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남자주인공이 한 여자를 만나서 겪는 사건과 심리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두겠다는 뜻이 된다.

결국, 그녀의 짝은 당신이 아니었다

익숙한 것들을 적절히 차용하면서도 진부하지 않은 결과물을 만들었다는 점이 <500일의 썸머>의 큰 미덕이다. 무엇보다 가장 익숙한 것은 착하지만 소심한 남자주인공 톰이 겪는 사랑의 사이클이다. 사랑의 설렘과 환희, 실연의 고통, 분노, 절망, 다시 찾아온 희망, 배신감, 체념, 극복까지 톰은 사랑의 사이클을 정확하게 한 바퀴 돈 뒤에 비로소 새로운 자아를 찾아 출발한다. <500일의 썸머>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특수하지만, 사랑의 기승전결과 후일담은 유사한 법이어서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보편적 경험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만일 이 영화가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나열한 로맨틱코미디였다면 엄청난 지루함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면서 참신함도 살린 영화의 전략은 시간의 재배치다. 정신없을 정도로 실제 시간을 뒤죽박죽 섞어놓은 서술의 시간은 관객으로 하여금 사랑이라는 사건을 한발 물러서서 객관적으로 보게 만들고 자신의 경험을 반추할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고 있다. 그 덕에 <500일의 썸머>는 한 남자의 사랑과 실연의 보고서를 넘어 인간이 어떻게 연애라는 사건을 통과하여 성장하고 변모하는가를 추적하는 영화이자 사랑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대한 실증적인 탐구생활이 되었다.

시간의 파격적인 재배치라는 형식적 특징에 비하면 영화에 두루 쓰인 다채로운 형식 실험은 재치있지만 독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내레이션과 인터뷰 형식을 섞어 페이크 다큐의 느낌을 살리거나, 뮤지컬 장면 삽입, 고전명화의 패러디, 애니메이션과 화면분할 등은 이제 낯선 것이라기보다는 익숙한 축에 넣어야 할 것이다. 많은 로맨틱코미디에서 남녀는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내 인생의 반쪽은 너라는 결론을 얻거나 겉멋에 홀려 홀딱 넘어간 상대가 아니라 진짜 내 짝은 옆에 있는 평범한 상대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서사는 남녀의 심리와 사건 전개의 추이를 따라가야 하지만 <500일의 썸머>는 차별화된 전략을 택한다. 순서를 무시하고 두서없이 끌려나오는 연애의 기억들은 톰이 겪은 사랑의 사이클에 존재하는 모두 시간을 같은 비중으로 다루는 결과를 초래한다. 심지어 가장 극단적인 순간을 숨고를 틈도 없이 맞붙여놓기도 한다. 첫 섹스 뒤 장밋빛 인생을 예찬하는 톰의 득의양양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바로 이어 실연당한 톰의 축 처진 몰골을 연결하는 식이다. 톰에게 연애 시작 40일째와 300일째는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차이가 있지만 영화는 이 두 시간을 등가로 놓고 있다.

<500일의 썸머>에서 톰이 첫눈에 반해 사랑한 썸머의 독특한 캐릭터는 영화를 진행시키는 핵심 동력이다. <봄날은 간다>의 은수(이영애)가 “자고 갈래요?”라는 도발적인 말로 상우(유지태)를 이끌었듯 썸머는 톰의 열정을 촉발시킨다. 먼저 불을 지피고 예고없이 불쑥 자리를 뜨는 여자주인공은 소년이 성장하며 만나는 매혹적인 장애물이다. 소년은 이들에게 매혹되지만 장악하거나 이해하지는 못한다. <500일의 썸머>에서 톰의 심리가 내레이션까지 동원되며 세밀히 설명되는 데 비해 썸머의 내면은 구체적이지 않은 까닭이 톰의 시선 속에 비친 썸머는 자신의 패러다임으로 해독할 수 없는 암호이기 때문이다. 썸머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톰을 처음부터 리드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더 스미스’의 음악을 화제로 먼저 말을 건 것도, “날 좋아해요?”라는 질문을 던진 것도, 복사실에서 기습 키스를 한 것도 모두 썸머였다. 도발적이고 자유분방한 썸머는 공원에서 낯 뜨거운 단어를 큰 소리로 외치고 비디오숍에서는 주저없이 성인물을 고른다. 둘만의 놀이를 만들어내는 것 역시 썸머의 몫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인 쇼핑센터 데이트 장면은 썸머의 매력을 잘 드러낸다. 썸머는 가구매장 소파에 천연덕스럽게 앉아 <아메리칸 아이돌>을 볼 시간이라며 TV 리모컨을 누른다. 썸머가 설정한 소꿉장난의 세계에 단숨에 동화된 톰은 주방가구 코너의 식탁으로 자리를 옮겨 썸머의 요리를 기다린다. 썸머를 바라보는 톰의 시선에 반쪽, 운명, 천생연분이라는 단어가 적힐 즈음 톰은 느닷없이 이별을 통보받는다. 톰은 썸머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연애의 기억을 반추하며 고민하지만 해답을 얻을 수 없어 분노하고 절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운명적인 사랑을 판타지라고 비웃고 심각한 관계가 싫다며 톰을 떠난 썸머가 결혼을 하고 임신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썸머는 너랑 만났을 때 몰랐던 걸 다른 남자를 만나서 문득 깨달았다고 말한다. 톰은 여전히 썸머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질문을 멈춘다. 실연당한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궁리하고 상대의 마음을 추론하는 끔찍한 시간을 보낸 뒤 질문 자체가 부질없다는 걸 깨달으면서 비로소 실연을 극복하게 된다. 제짝이 아니었다는 단순한 대답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썸머에게 톰은 장악하기 쉬운 편안한 남자친구 이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실연을 극복하고 꿈을 향해 한 발 내딛다

<500일의 썸머>라는 제목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썸머라는 단어는 으레 계절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사실 ‘썸머’는 여성의 이름이다. 그런데 영화의 끝에 썸머라는 단어가 한 여성의 이름인 고유명사가 아니라 지나간 사랑을 지칭하는 일반명사의 위치로 바뀌면서 여름이라는 계절의 상징이 중첩되는 흥미로운 현상이 발생한다. 여름이 그렇듯 ‘썸머’라는 이름으로 다가와 인생의 한 시절을 뒤흔드는 사랑 역시 언젠가는 지나가고 격정은 가을의 결실로 남게 된다. 톰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늘 상담을 청했던 자신의 10대 여동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소년이었던 것이다. 여동생은 어른스럽게 썸머는 오빠의 반쪽이 아니라고 위로하고 세상에 여자는 많다고 충고하지만 둘은 오십보백보의 자리에 서 있다. 톰은 세월이 약이라는 진리를 경험을 통해 깨달고 어른이 되면서 그 자리를 벗어나게 된다. 톰과 썸머의 관계는 실질적으로 488일에 끝나는데 영화의 제목은 ‘500일의 썸머’다. 500일은 톰이 새로운 사랑을 찾은 첫날이자 썸머와의 관계가 완전히 소멸되는 날이다. 톰이 새로 만나게 된 여자의 이름은 ‘오텀’이다. 어쩌면 그는 오텀과 윈터를 거친 뒤 스프링을 만날 것이다. 그의 사이클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실연의 상처가 아물 무렵 톰은 사표를 던지고 자신의 꿈이었던 건축사의 길에 도전한다. <봄날은 간다>의 상우가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고 음향 엔지니어라는 본연의 일로 돌아갔듯이, <500일의 썸머>의 톰도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는 마지막 수순으로 자신이 꿈꾸던 일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500일의 썸머>는 사랑과 일이 변증법적으로 지양되는 남성 성장의 공식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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