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의 ‘선택’에 이어 이번엔 부산국제영화제의 AND(Asian Network of Documentary) 쇼케이스다. 다큐멘터리 상영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쏟고 있는 예술영화전용관 하이퍼텍나다가 올해 두 번째 ‘다큐 인 나다’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상영작은 정일건 감독의 <대추리에 살다>를 포함해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였던 AND 프로젝트 10편이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주관하는 AND는 2006년 출범했으며 그동안 아시아 다큐멘터리 펀드 운영, 제작·배급 지원 방안 등을 마련해왔다. 3월31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8시20분 서울 대학로 하이퍼텍나다에서 열릴 이번 쇼케이스는 역사와 인간에 대한 아시아 다큐멘터리들의 공통 관심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아버지와 아들>(유안허, 2월10일 상영)은 죽음을 앞둔 아버지와 그를 간호하는 아들이 주인공이지만 가족애를 다룬 흔한 다큐멘터리와는 다르다. 병든 아버지를 돌보는 50살 넘은 중년의 아들은 지적장애를 갖고 있다. 아들은 갖은 애를 쓰지만 결과는 항상 신통치 않다. 하지만 병상의 아버지는 부족한 아들에게 끊임없이 요구해야 하는 곤란한 처지다. <아버지와 아들>은 “중국 나시족 최후의 민속음악가인 차이의 마지막 순간”을 포착한 영화이기도 하다. 삶은 언제나 절름발이였음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을 비추면서 “전통의 생성과 소멸 또한 자연의 일부”임을 일깨운다.
<회복의 길>(테미 추, 3월3일 상영) 또한 가족을 다룬다. 어릴 적 해외로 입양됐던 브랜트는 30년 만에 고국을 찾아 생모인 명자를 만나지만 두 모자가 공유하는 기억은 아무것도 없다. 버린 엄마와 버려진 자식이라는 씁쓸한 상처만을 건드릴 뿐이다. 누락된 과거를 복원하기 위해 안간힘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가족 이야기. <선화, 또 하나의 나>(양영희, 2월24일 상영)는 세대를 거쳐 계속되는 이민을 소재로 삼는다. 재일동포인 감독은 30여년 전 북한으로 이주한 오빠의 딸을 통해 역시 ‘이민 후 세대’인 자신을 돌아보는 동시에 지극히 보편적인 북한의 일상을 드러낸다.
세상의 혼돈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 또한 다큐멘터리의 목적이다. <무질서>(후앙웨이카이, 2월17일 상영)는 아이러니한 거리의 풍경을 거르지 않고 옮겨낸다. 도로에서 광인들은 춤추고, 돼지들은 길을 가로막고, 인부들은 문화재를 훼손하고, 경찰들은 폭력을 행사하고, 오직 이곳에선 무질서의 아우성만이 존재한다. 반대로 과도한 질서가 초래한 비극도 있다. <학교>(웨이테에, 3월17일 상영)는 중국의 한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삼는데, 이곳의 교사와 학생들은 주어진 제도의 노예들이다. 관료제에 옥죄인 학교는 내일을 약속하지 않는다.
더 나은 미래는 편견과 차별을 제거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버진>(타헤레 하싼자데, 3월31일 상영)은 아직도 처녀증명서를 발급받아야 대접받는 이란 사회의 단면을 고발한다. 처녀증명서의 진위 여부를 두고 가족들이 서로를 고발하는 어이없는 코미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잔혹한 세상은 힘없는 소수자들에게는 더한 고통이다. <리알을 찾아서>(케상 체텐, 3월24일 상영)는 걸프만으로 돈 벌기 위해 떠나는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비춘다. 생계를 위해 삶을 고스란히 팔아야 하는 네팔 이주노동자들은 걸프만이 아닌 우리 곁에도 있다.
가혹한 현실 앞에서 인간의 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안나의 길>(나오이 리요, 3월10일 상영)은 10년 전 HIV에 감염된 여성이 삶을 복구하는 이야기다. 안나는 “한 남자의 아내, 10대 딸을 둔 엄마, HIV 활동가로서의” 역할을 모두 해내며 좀더 나은 내일을 꿈꾼다. 오늘은 견뎌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Inter View>(이미영, 3월31일 상영)는 카메라로 주변이 아닌 자신을 되돌아보는 작품이다. 감독은 “시력을 잃어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카메라와 대상 사이에 개입하는 권력 관계를 되묻는다. 다큐멘터리는 그제야 나와 세상이 만나는 평등한 장이 된다(http://cafe.naver.com/in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