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히 알려진 대로 지진희는 손재주가 좋다. 한때 공예를 전공했던 사람답게 이것저것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즐긴다. 그는 배우로서의 삶에도 똑같은 원칙을 적용한다. 어느 한 작품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며 경험을 분해해 교훈으로 조립할 줄 안다. <평행이론>의 석현은 이러한 ‘분석가’ 지진희의 기질과 가장 맞닿아 있는 캐릭터다. 운명보다 자신의 판단력을 믿고, 감정보다 이성으로 판단하는 이 인물은 ‘평행이론’에 휘말리며 자신의 신념을 모두 저버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인간 지진희와 캐릭터 김석현에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런 지점일 것이다. 공예, 디자인, 사진 관련 직업을 거쳐 배우 인생 10년차에 들어선 지진희는 환경이 바뀌어도 변치 않는 신념을 간직하고 있었다. “일은 일대로, 가정은 가정대로” 철저하게 지켜나가겠다는 완벽주의자로서의 각오가 바로 그것이다. “죽을힘을 다해” 이 원칙을 사수하고 있다는 이 배우는 벌써 10년 뒤 자신의 모습을 구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2009년에 굉장히 바빴다. 영화만 두편(<평행이론> <집나온 남자들>)에 드라마도 한편(<결혼 못하는 남자>), 그리고 와인 관련 서적까지 냈다. =와인책(<이탈리아, 구름 속의 산책>)은 지지난해에 이탈리아 다녀온 걸 지난해에 낸 건데 뭐. 놀면 뭐하나.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지.

-1월16일에는 <동이> 제작진들과 상견례했다는 기사를 봤다. =이 작품으로 좀 쉬려고 했다. 내 역할이 왕(숙종)이니까 대전에만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아, 쉬자! 이러고 있었는데 이병훈 PD는 ‘움직이는 왕’으로 설정했다고 하더라. 종사관으로 분장해서 밖에도 나간다고 하고. 그래도 (야외촬영 많은 것보다는) 낫겠지.

-<동이>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우선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왔고, 내가 대통령이나 왕 역할을 꼭 해보고 싶기도 했다. 대신 ‘대통령’ ‘왕’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아닌 새로운 모습의 캐릭터를 맡고 싶었다. 예를 들자면 <러브 액츄얼리>의 휴 그랜트가 연기한 영국 총리 같은 캐릭터. <대장금> 이후로 사극이란 사극은 다 연락이 왔는데 안 하겠다고 했다. 궁극적으로는 나에게나 관객에게나 마이너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은 모습이 많이 있는데 이미지가 고정되면 다른 모습을 보는 재미가 떨어지니까. 그런 점에서 <동이>의 숙종은 왕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했다.

-그 새로운 모습을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1~2% 부족한 왕이다. 뭔가 하려고 하는데 그걸 누가 먼저 해버렸다면 “쟤, 유배 보내라” 하는. 강하고 남성적인 모습도 있지만 약간 부족한 부분도 있는 왕이 될 거다.

-컨디션이 가장 좋을 때만 시나리오를 읽는다고 들었다. =한번에 끝까지 읽으려고 그런다. 시나리오가 단숨에 쫙 읽히지 않으면 난 안 한다. 안 한다기보다는 못한다. 한번에 안 읽히는 작품이면 나중에 읽어도 안 읽히더라. 여태껏 출연한 작품들은 한번에 다 읽은 작품이었던 것 같다. <평행이론>도 시나리오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어떤 점에 끌리던가. =자기가 이제껏 믿지 않았던 것들을 어쩔 수 없이 믿게 되고, 숨겨진 부분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계속 반전이 일어나고, 그래서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는 그런 상황 설정에 끌렸다. 미국 드라마 <24>를 너무 좋아하는데, <평행이론> 시나리오를 보고 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2주 동안 리허설을 했다고 들었다. 권호영 감독은 이 과정이 굉장히 도움됐다고 하던데, 어떤 준비들을 했나. =중요한 장면을 3신 정도 정해서 실전처럼 촬영했다. 카메라 장비 다 챙기고 분장도 하고 진짜 촬영할 장소에 가서 이틀 동안 밤새도록 촬영했다. 그런 과정이 정말 좋았다. 사전준비를 철저하게 해두니 캐릭터에 접근하기도 쉽고 놓치고 갈 수 있는 부분도 한번 더 생각해볼 수 있었다. 보통 다른 현장에서는 준비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가기 때문에 첫 촬영분을 다시 찍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예상보다 몇 회차 빨리 끝냈다.

-<평행이론>에서 최연소 부장판사 석현 역을 맡았다. 제작진 평가와 관객 설문조사에서 모두 배역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당신을 뽑았다던데. =감독님이나 제작사 분들이나 내가 판사 옷을 입고 서 있었을 때 굉장히 잘 어울렸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이 역에 어울리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실제로 내 성격도 석현과 비슷하다. 나도 99% 확신이 있어도 1%가 미흡하면 ‘이건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감성적이라기보다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편이고. 난 무조건 우리 가족 편드는 사람이 아니다. “이건 우리가 잘못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지. (웃음) 그래서 오히려 내 방식대로 쉽게 연기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맡았던 역할이 다 쟁쟁하다. 의사(<봄날>), 교수(<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기자(<스포트라이트>), 이번에 판사까지. 대중이 지진희에게 기대하는 어떤 이미지가 있는 듯하다. =듣고보니 그렇네. 다음엔 왕인데…. (웃음)

-판사 캐릭터 준비는 어떻게 했나. =워낙 감독님이 준비를 많이 해오셔서 캐릭터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참고하면 좋을 듯한 동영상과 이미지를 장면마다 찾아오셨더라. 그리고 최연소로 부장판사가 된 분을 만났다. 그분이 판결문에 관련된 대사를 고쳐주셨다. 근엄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렇지가 않았다. 엊그저께도 만나서 식사했다. 스포츠를 좋아해서 철인삼종경기 연습도 같이 하고.

-판사와는 무슨 얘기를 나눴나. =그 속내에 대해 많이 물었다. 내가 만난 분은 지금은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하고 계신데, 왜 그만두게 됐는지 뭐 이런 얘기들을 나눴다. 판사라는 직업이 정말 힘들더라. 법대로 판결을 내리다보니 늘 불리한 쪽이 생기니까. 안전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미흡하고. 판결을 내리고 집에 가려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판결내린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때 굉장히 힘들다고 하시더라. 내가 이런 짓을 하고 있어야 되나 별별 생각이 다 들고. 그런 점이 고통스러워 관두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다. 심지어 자살까지…. 강한 정신력 없으면 힘들겠더라.

-석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에 의해 흘러가게 되는 캐릭터다. 운명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어느 정도 믿는 부분이 있다. 내가 연기를 하게 된 까닭도 그런 부분이 있고. 고등학생 때는 대학을 갈 이유가 없었다. 금속공예를 해서 먹고살 줄 알았는데 어느 실장님의 권유로 대학에 가게 됐고, 어쩌다보니 금속공예와 전혀 상관없는 편집디자인과에 입학했고, 제일기획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사진을 시작하게 됐고, 성혜 누나의 설득에 딱 1년만 배우합시다, 이랬는데….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느낀 건 이 세상 최고의 직업은 디자이너다, 사진가다, 공예가다, 이렇게 생각해왔고 지금 현재로서는 그 최고의 직업이 배우지만 한편으론 내가 나중에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의문이라는 거다. 이제까지 계속 바뀌어왔으니까.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그 다음 것도 제대로 못한다는 거다. 지금 일이 미래에 밑바탕이 되니까. 그래서 지금 하는 일도 죽어라 하는 거다. 목숨을 걸고. 그러면 이 일로 끝장을 보든, 다른 일을 하든 간에 더 잘할 수 있는 발판이 되지 않겠나.

-매니저였던 박성혜씨도 얼마 전 이 코너에서 인터뷰했다. 늘 지진희씨를 언급하며 가장 아끼는 삼총사(김혜수, 전도연) 중 한명이라고 얘기하던데. =우리 셋이 각자 다르다. (성혜 누나랑) 치고받고 상처받고 울고불고하다가 미안하다고 화해하는 사람이 도연이라면 혜수 누나는 하루에 한번씩은 통화하는 사람.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다. 누나를 믿고 그냥 맡겨버리는 사람. 난 누나에게 단 한번도 먼저 전화한 적이 없다. 누나가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이지 먼저 하는 사람은 아닌데, 늘 나한테는 먼저 전화를 걸었다. 한번은 누나가 “진희야, 왜 나한테 전화를 안 하니?”라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누나, 열심히 하고 있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저까지 전화해서 누나에게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냐고 물어보고 닦달하면 피곤하잖아요.” 그랬더니 그렇긴 하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그 피곤을 안 주겠다, 대신 안 주는 만큼 나에게 좀더 신경을 써달라고 했다. 누나가 처음엔 그런 점에 대해 서운해하다가 나중에 내가 왜 그러는지 알게 되면서 믿음이 생긴 거다.

-하정우와도 친한 걸로 알려져 있다. <평행이론>의 출연도 직접 권유했다고 들었다. =그렇다. 내가 권유했지만 모든 제작진이 원하기도 했다. 살인마 역할인데, <추격자> 등 그전에 정우가 연기했던 모습들이 컸던 것 같다. 정우랑 술 먹을 일이 있었는데 내가 형이라 그런지 정우가 여자친구 얘기, 자기 속 얘기를 털어놓더라. 나는 또 그걸 듣고 여러 가지를 얘기해주면서 친분을 쌓았다. 알고 보니 걔가 형 얘기를 거절 못하는 성격이더라. 그래서 잘됐다 싶어서(웃음) 이런 영화가 있는데 네가 좀 해줬으면 좋겠다, 나중에 네가 어떤 캐릭터든 부탁하면 나도 해주겠다고 말했다. 정우가 수락하면서 “형, 뭐 이런 영화도 있던데…”라고 다른 영화 얘기를 해서 “알았다, 할게” 그랬는데. 그 영화는 엎어졌다. 엎어졌다기보다는 촬영이 미뤄진 거겠지.

-부인 역을 맡은 윤세아를 제외하면 등장인물이 대부분 남자다.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자유로웠다. 종혁이나 정우나 평소에 운동 같이 하던 친구들이라서 어색한 것도 없었고, 신인이나 고참 선배가 있었다면 아무래도 어려웠을 텐데 우리끼리니까 서로 자기 할 일 하고, 딴짓해도 관심도 없고. (웃음) 또 그 친구들이 재미있다. 코미디언처럼 웃기진 않아도 나름의 독특한 웃음 포인트가 있다.

-그 웃음 포인트가 뭔가. =종혁이는 순간순간 재미있다. 근데 쉽게 잊혀지는 그런 거고. (웃음) 정우는 묵직하면서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다. 후배들이나 친구들을 우르르 이끌고 대장처럼 분위기를 주도한다. 나는 툭툭 치고 들어가면서 나중에 웃긴다. 아니면 좀 겪어야 재미있을 사람이고.

-드라마와 영화 출연작을 결정하는 기준이 다른 것 같다. 드라마 작품들이 대중친화적이라면, 영화 출연작은 상업성과는 거리를 둔 작품들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보는 사람을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익숙한 모습들은 TV에서 충분히 보셨으리라고 생각한다. 돈 내고 극장 오실 때는 새로운 모습을 보시라는 거지. TV랑 비슷한 역할하면 관객이 와서 굳이 볼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러니까 저의 새로운 모습 보고 싶으시면 극장에서 보세요! 이거, 다분히 전략적인데? (웃음)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서 함께했던 이하 감독과 <집나온 남자들>(올해 4월 개봉예정)을 촬영했다. <동이>의 이병훈 PD도 <대장금>에서 함께했었고, 황인뢰 PD의 작품도 몇편 출연했다. 한번 작업한 연출자와 인연이 오래가는 듯하다. =그게 내 매력 아닐까. (웃음) 사실 난 한 감독의 작품에 계속 출연하는 건 반대다. 그보다는 젊은 친구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졌으면 한다. 드라마나 영화에 보던 사람만 계속 나오면 짜증나거든. 다행히 내 영화는 아직까지 흥행된 게 없기 때문에 난 계속 나와도 된다. (웃음) 하지만 내가 나중에 대박을 낸 영화가 있다면, 감독님의 다른 작품에 조연으로 출연하거나 카메오로 출연하는 건 좋을 것 같다. 이런 계약은 어떨까. 200억원짜리 영화를 해서 대박이 나면 그 5~10% 규모의 저예산영화에 무조건 출연하는 거. 나는 작은영화 하고 싶은 마음도 굉장히 많다. 우리나라 영화의 미래잖나. 아직 나는 톱스타가 못 됐지만, 된다면 꼭 작은영화에도 관심을 쏟고 싶다.

-올해 마흔이 됐다. 배우 인생으로 본다면 지금이 어느 지점일까. =65% 정도 온 것 같다. 앞으로 100까지 가야지. 내가 10년 동안 이만큼 왔으니 나머지 45% 가는 데 10년은 걸리지 않을 것 같다.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밑그림이라도 있나. =물론이다. 그런데 비밀이다. 엄청난 비밀.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