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곤의 영화는 우리를 상상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아니 안내한다기보다는 손목을 잡고 이끌어간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꽃섬>에는 얼마간 ‘해석에의 강요’가 있다. 영화 속의 이미지들은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이 명백히 작위적으로 배치된 것임을 드러내는 징후들을 찾아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잠깐이라도 우리가 상상에 빠질라치면 금세 눈앞에 나타나 예정된 여정으로 귀환할 것을 요구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송일곤은 <꽃섬>에서 모종의 강신술(降神術)을 펼친다. 그는 이 인물 저 인물 사이를 옮겨다니며 인물들(과 우리)을 응시하고 다그치고 위로하다가는, 마침내 소녀 혜나의 날개를 품에 안은 유진의 몸을 빌려 승천해버린다. 한마디로 <꽃섬>은 송일곤 자신의 변조된 목소리를 들려주는 복화술이자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을 향해 울리는 조종(弔鐘) 같은 영화이다. 어떤 순간에 <꽃섬>의 인물들은 우리에게 흡사 립싱크된 음악을 들려주는 것 같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이 영화가 애초부터 관객을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꽃섬>을 ‘성인들을 위한 동화’라고 부르는 건 궁색한 변명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로드무비이다. 나는 한국영화에서 로드무비란 이제 시효가 끝난 것으로 생각했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더이상 걷지 않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로드무비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어느 곳이라도 차를 타고 달리면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다. <삼포로 가는 길>의 인물들을 위한 공간은 더이상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우리 로드무비의 주인공들은 구도자가 되어야 했다. 그들은 막연한 대상 혹은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찾아 나섰기에 끊임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여기선 무엇보다 가까워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만다라>의 주인공들이 그렇다. 때로 그 주인공들이 도주자일 경우도 있다. 역시 그들은 어느 한곳에 머무를 수 없는 뚜렷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붙잡히지 않기 위해 그들은 계속 움직여야 한다. 이 경우엔 멀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고래사냥>이나 <세상 밖으로> 같은 영화를 생각해보라. 물론 구도와 도주의 과정은 각각의 로드무비들에서 종종 뒤섞여 나타나기도 한다. 길 자체에 매혹당한 인물, 움직임 자체에 이끌리는 인물이 등장하는 순수한(?) 로드무비란 적어도 지난 시절엔 사치였을 것이다.
로드무비라 부르기엔 좀 망설여지지만 문승욱의 <나비>는 로드무비의 현재적 불가능성을 극복한 드문 경우다. 거기서 대상(망각의 바이러스)은 끊임없이 자리를 바꾼다. 인물들은 미로와도 같은 도시공간을 유랑하는 존재들이다. 게다가 그들의 탐색의 목적은 구도의 완성, 희망의 발견등이 아니라 절망과 상처의 망각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도피하는 자들이다. 문승욱은 ‘구도의 로드무비’와 ‘도주의 로드무비’를 매우 아이로니컬한 방식으로- 가까워져야만 멀어질 수 있다- 절묘하게 통합한다. 반면 송일곤은 어떻게든 이전의 로드무비의 공간을 다시 한번 불러들이려고 시도한다. 이건 좀 기이한 선택인데 왜냐하면 송일곤은 종종 리얼리즘으로부터의 탈주를 역설해왔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그가 어떻게 리얼리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그 공간을 재현하는가 하는 데 놓인다. 물론 이런 시도가 처음인 것은 아니다. 이장호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무속을 끌어와 리얼리즘적 환기로 가득한 영화공간에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불러들인 바 있다.
<꽃섬>이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서울을 벗어난 인물들이 향하는 곳은 눈 덮인 산중턱이다. 이어 그들은 스탠드바 ‘태평양’, 술집 ‘춘희’와 같은 조락의 냄새 완연한 공간들을 지나쳐서는 마침내 돌담길과 낡은 교사(校舍)가 있는 꽃섬으로 향한다. 그러니까 <나비>에서와 같은 도시공간은 <꽃섬>의 여백에 놓이는 것이다. 이 과정은 간간이 삽입되는 플래시포워드와 플래시백 장면들을 제외하면 매우 리얼리즘적인 화법으로 묘사되고 있다. 삽입된 장면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창가에서 날갯짓하는 혜나의 실루엣, 바닷가에 서 있는 혜나 어머니의 환영, 불꽃을 하늘에 높이 쳐드는 유진, 포커스아웃으로 처리된 불꽃놀이하는 여인들의 모습, 크레인에 매달려 공중에 떠 있는 배, 그 배에 타고 있는 유진. 나중에 가서야 이상의 장면들은 결국 모두 꽃섬에서 벌어진 일들(의 플래시포워드)임을 알게 된다. 이 가운데에는 극적 맥락과 관련된 것들도 있지만- 가령 옥남이 혜나에게 남해엔 왜 가려고 하냐고 묻자 혜나는 자기를 낳아준 사람을 만나러 간다고 대답한다. 이때 혜나 어머니의 환영이 삽입된다-, 어떤 것들은 전혀 무관한 것들도 있다(혹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로서는 그 장면들이 거기 왜 갑자기 끼어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술적 과시? 몰입의 방해? 아니면 그저 느낌에 따라?) 반면 플래시백 장면- 잠든 주희 곁에 앉아 있는 옥남, 자신이 버린 물건들을 뒤져 소리상자 하나를 찾아내는 유진, 그리고 주희에게 마술을 보여주는 옥남의 모습- 들은 과히 독창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꽤 설득력이 있다. 이 가운데 유진의 플래시백 장면은 그녀가 산 속에서 발길을 돌려 다른 두 여인과 합류하려 마음먹을 때 삽입되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인서트는 검은 머리의 혜나를 보여주는 흑백장면인데 이는 과거의 혜나일수도 혹은 혜나 어머니의 젊은 날의 모습일 수도 있다.
꽃섬에서 벌어진 이른바 ‘기적’까지를 고려하면 결국 영화 <꽃섬>은 앞에서 말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와 김기영의 <이어도>를 반반씩 섞어놓은 것 같은 영화다. 한 배우가 1인2역을 맡은 것- 단편 <소풍>에 출연했던 손병호는 <꽃섬>에서 옥남의 남편 역과 게이밴드의 멤버 역을 동시에 맡았다- 과 인물들이 가로질러가는 공간의 특성등을 고려해볼 때 <꽃섬>은 확실히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나는 글머리에서 <꽃섬>이 설득을 포기한 영화이며 동화라는 성격규정은 궁색한 변명처럼 들린다고 말했다. 송일곤은 자신의 인물들을 이전의 로드무비들의 공간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무리수를 둔다. 눈 덮인 산중턱에 버스를 올려다 놓고는 버스기사로 하여금 ‘인생이란 다 그런 것 아니’겠냐고 말하게 하는 데서는 솔직히 실소밖에 안 나온다(여기서 배드민턴 치는 장면을 근거로 ‘현실에서 환상으로’ 운운하는 건 그야말로 꿈보다 해몽이 아닐 수 없다). <나비>에 비하면 참으로 궁색하기 짝이 없는 선택인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은 다름아닌 꽃섬에서의 ‘기적’이다. 만일 <꽃섬>에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용어를 들이대고 싶다면 그건 마술이 일종의 눈속임이라는 걸 인정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꽃섬에서 유진이 사라지는 장면은 완벽한 ‘마술적’ 몽타주를 보여준다.
그녀의 사라짐, 혹은 승천을 납득시키기 위한 영화적 장치는 기실 아주 단순하다. 바닷가에 나타난 혜나 어머니의 환영을 보여준 뒤 잠시 혜나(와 관객)의 시선을 그쪽으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나서 다시 배를 보여줄 때 유진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시선을 억지로 돌려놓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그 다음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고 있다. 마술사가 손 안에 지폐를 움켜쥐고는 청중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요구한다. 잠시 뒤에 눈을 떠보면 돈은 그의 손에서 사라지고 없다. 청중이 비웃는 가운데 마술사의 조수가 증인을 자처하고 나선다. 분명 그 돈이 별안간 사라지는 걸 똑똑히 보았노라고. 꽃섬에서 벌어진 ‘기적’의 증인은 바로 옥남과 그녀의 ‘천사친구’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도중 보여주었던 태도로 인해 그녀들의 진술은 그다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오히려 섬에서 벌어진 일이 자살을 조장하고 방조한 정신이상자들의 유희처럼 보여지고 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따라서 여기엔 하나의 균열이 존재한다. 개연성과 환상성 그 모두를 아우르려는 욕망이 낳은 모호한 태도. 끊임없이 동화임을 강조하면서도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 종종 리얼리즘의 화법에 의존하는 <꽃섬>전체의 특징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장면은 없을 것이다. 관객은 그 어느 쪽- 그 여자들이 미친 것인가 혹은 진짜로 유진이 사라진 것인가- 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이 장면은 대단한 감흥을 이끌어내진 못한다. 김기영은 <이어도>에서 현실과 환상, 합리성과 무속을 어정쩡하게 뒤섞는 대신 양 대립항 모두를 아우르는 절묘한 봉합의 솜씨를 보여준 바 있다.
아마 송일곤은 유진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그녀가 물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너무 직접적인 화법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란 그처럼 직접적으로 보여지는 환상 덕분에 매력을 주는 매체가 아니었던가? 관객 또한 그것을 믿는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천상의 종소리를 우린 의심없이 감동적으로 받아들인다. 혹은 <매그놀리아>에서의 개구리비도 마찬가지다. <백년동안의 고독>에 나온 레메디오스의 승천장면- 그녀 또한 담요에 휩싸여 공중으로 사라진다- 정도까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꽃섬>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망설이면서 다소 사람을 맥빠지게 만든다. 뒤늦게 흘러나오는 음악만이 애써 설득을 강요할 뿐이다.
무력한 주인공들
송일곤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매우 무력한 존재이다. 그들이 무능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송일곤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어찌할 바 없는 상황 속으로 그들을 밀어 넣는 것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매우 가혹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무척이나 사려깊은 감독이기도 하다. 식구들을 위해 아우의 간을 팔아 감자를 산 형에게 미소를 보내 주고(<간과 감자>), 아이를 변기에 흘려보낸 소녀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가 하면(<플러쉬>) 동반자살의 희생자가 될 뻔한 아이를 한 노인을 통해 살려낸다(<소풍>) <꽃섬>에서는 유진을 구해 주는 산 속의 노인, 여자들을 꽃섬에 데려다주는 박희진 등이 등장한다. 송일곤의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장치와 인물들은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설득을 상징과 현자(賢者)의 존재로 대신하려는 교묘한 위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라스 폰 트리에식의 치열함을 거쳐 마침내 다다른 구원과는 다른 것이다. 그는 과도하다 싶게 작품 속에 개입하곤 하는데- 하지만 이건 작가의 자유다-, 첫 장편 <꽃섬>에 있어서 특히 그러한 장치들을 통한 매듭은 너무나 헐겁게 느껴진다. 여기서 다시 이 영화는 우화나 동화라고 말하려고 한다면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 <꽃섬>은 전혀 관념적이라 할 것도 없는 영화지만 굳이 이 영화가 그렇게 보이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마 송일곤이 몸에도 안 맞는 지나치게 큰 옷을 걸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 그대로 허공에 뜬 관념이다(크레인에 매달린 배 위에 서 있는 유진의 모습을 보라). 시간이 지나면 옥남의 목소리와 빈 스탠드바 무대에서 게이멤버 하나가 노래부르던 장면만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영화이다. 이런 요소들 때문에 영화가 지나치게 땅에 밀착해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을 우려하는 감독이 있다면 <마이 로리> 한번쯤 넣어줄 일이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