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편을 만들면 8편이 성인물이던 1980년대 영화계. 외화에 떠밀린 한국영화의 위치는 작고 나약했다. 이장호 감독을 주축으로 한 새로운 한국영화의 흐름이 시작됐고, 그 중심에 여배우 이보희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 <어우동>과 같은 성인물로 인기를 모았으며, <과부춤> <바보선언>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등의 작품을 통해 이보희는 새로운 시대의 여성을 연기했다. 기존 여배우와 다른 도회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스크린을 떠난 지 15년. 이보희가 <식객: 김치전쟁>으로 돌아왔다. 2010년의 현장에서 돌아본 그녀의 지난 시절을 만났다.
-영화 참 오랜만이다. =한 15년은 된 것 같다. 기회도 없었고, 대부분 젊은 사람 위주 영화라 나이도 맞지 않고 어정쩡하더라. 게다가 우정출연, 특별출연은 하고 싶지 않더라.
-<식객: 김치전쟁>(이하 <식객2>)은 오랜만의 엄청난 결심이다. 권유나 친분이 작용한 건가. =친분이나 그런 건 없었고 캐릭터가 좋았다. 엄마라는 역할은 평범하지만 <식객2>의 엄마 캐릭터는 하고 싶었다. 고집스럽지만 이기적이지 않은 엄마. 이런 느낌의 엄마라면 출연해도 되겠다 싶더라.
-그러게. 자식 결혼문제에만 급급하는 요즘 드라마의 병풍 역할과는 확실히 다른 역할이다. =TV에선 너무 그악스런 엄마들이 많다. 시청자에게 뭔가 강렬한 걸 보여줘야 하니까 강하게 나갈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데 이 엄마는 편안하더라. 딸(김정은)과의 관계를 보면서 우리 엄마가 만들어주는 밥 생각이 그렇게 나더라. 코믹을 내세우고 있지만 막상 보면 아주 편하고 가슴 짠한 드라마다.
-현장 적응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80년대 현장이 익숙할 텐데, 많이 달랐겠다. =많이가 아니라 완전히 달라졌다. 현장 모니터조차 생소했다. 구도도 배우 움직임도 현장에서 바로 보니 신기하더라. 당시엔 모니터도 없고 감독이 카메라 뷰파인더 가끔 보는 게 전부였다. 감독이 왕이었던 시대였다. 기술적인 실력은 지금이 더 첨단화됐지만, 어찌 보면 그때 감독들이 더 예술적인 감수성은 넘쳤던 것 같다.
-지금 현장에도 장점이 많지 않나. =무엇보다 편하더라. 지금은 대역이 다 하지 않나. 옛날엔 직접 배우가 운전하는 신 찍다가 지프가 뒤집어지기도 했다. 이번에 드라마 찍으면서 영화도 함께했는데, 드라마 촬영 때 쉴 틈 없이 바삐 찍다가 영화현장 가서 하루에 두신, 세신 찍고 오니 영화만 찍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 음식영화라 그런지 먹을 것도 많고. (웃음)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자신을 보는 감회는 관객보다 더 생소했겠다. =기자시사회 전날 너무 많이 떨리더라. 영화가 어떻게 나올까 하고. 디지털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거의 20년 가까이 영화를 했는데 나이도 먹고 늙었으니 내 얼굴이 화면에 어떻게 나올까도 궁금하고. 잠이 잘 안 오더라.
-피부가 그대로더라. 그런데 이제 늙는 걸 걱정하는 나이라니. 80년대 여배우 이보희 하면 최고의 스타였다. 80년대 흥행작 중 상당수가 이보희 주연의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우동> 흥행 성공으로 스텔라 승용차를 보너스를 받기도 했다던데. =<겨울여자> 이후 최다 관객 수였다. 다들 출세작 한편씩 있지 않나. 내 출세작은 <어우동>이었다. 지금도 이보희 하면 <어우동>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다양한 작품을 했으니 나이 먹어서도 부끄럽지 않지만. 제작사 대표였던 이태원 사장이 스텔라 승용차를 사주셨는데 그전까지 버스 타고 다니다가 그때부터 자동차 타고 다녔다.
-개런티도 최고였고, 이른바 화려한 여배우의 궤도에 오른 거다. =생활이 다 좋아졌다. 지금 배우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액수지만 당시에는 최고 대우였다. 강수연도 <씨받이>로 해외영화제 수상하고 3500만원 정도로 껑충 뛰었을 때였다.
-엄청난 특혜다. =캐스팅됐을 때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신인이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촬영은 캐스팅된 뒤 3년 지나고 나서였다. 오디션에 발탁되고 나서 북, 장구, 승무 다 배우고 있었다. 한 1년 넘게 연습했는데, 갑자기 제작사였던 현진영화사가 손을 뗀 거다. 이미 주연배우로 언론 플레이까지 다 했는데 이장호 감독이 속이 많이 타셨다. 그래서 캐스팅한 배우 책임지는 셈치고 여기저기 다른 영화에 끼워넣었다. 그게 <일송정 푸른솔은>이었다. 그 영화 보고 영화관계자들이 이미지를 좋게 보고서 <무릎과 무릎 사이> <과부춤> 같은 작품을 연이어 할 수 있었다.
-노출을 전제로 한 영화들이었는데 거부감은 없었나. =겁이 났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인 때였으니까. 지나고 보니 요즘 영화들 수위와는 비교도 안되지만, 당시에는 그게 정말 심한 수위였다. 그런데도 이건 해야 하는 거다 생각하고 들어가니까, 막상 찍을 때는 무슨 생각으로 찍었는지 모르겠더라.
-당시 안소영, 원미경 등이 활약하던 시절이었다. 워낙 에로영화 붐이었고, 동양적인 마스크와 글래머러스한 배우를 선호하던 시기였는데, 정반대의 외형이었다. =당시엔 나처럼 얼굴이 작은 배우가 별로 없었다. 눈도 크고 동그란 얼굴이 미인이던 시절이었다. 스크린 크기가 워낙 크잖아. (웃음) 그러니 코도 오똑하고 서구적으로 생긴 나같은 마스크에 이질감이 있었지. 나 역시 내 얼굴이 작다거나 예쁘다거나 그런 생각을 못했다. 방송국 기수로 들어갔지만 영화에 캐스팅되기 전엔 만날 단역만 했으니. 그런데 한복 입혀보니 태가 난 거다. 옛날에는 후덕한 이미지의 배우들만 사극하는 줄 알았는데 나를 기점으로 캐스팅할 때 기준이 달라졌다.
-그런 도회적인 이미지 덕으로 이보희는 색다른 배우로 통했다. 에로 이미지를 벗지 못했던 다른 배우들과 달리 다양한 이미지의 연기를 선보였다. <어우동> 끝나고 가진 인터뷰에선 ‘돈과 명성은 얻었지만 작품성있는 연기를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던데. =대개 <어우동>이나 <무릎과 무릎 사이> 같은 에로틱한 영화를 찍었다 하면 그 배우를 한 방향으로만 몰고 가버린다. 그게 너무 싫더라. 한 역할로 호평을 받았다고 같은 유의 캐릭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름이 알려지고 나니 제안은 많이 왔는데 대부분 배우의 더 나은 면을 뽑아줘야지 하는 감독은 없었다. 유명세로 그저 돈 많이 버는 게 목표였으니까. 시나리오를 먼저 본다고 해도 시나리오대로 찍는 것도 아니었다. 계약한 뒤에 현장에서 노출신을 넣거나 해도 할 말이 없을 때였으니 선택에 더 조심스러웠다. 다작이 추세였는데 난 한 작품 끝나고 다른 작품에 맞물려 가는 느린 속도였다. 그래서 개런티를 많이 받았는데도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다.
-외화가 극장 판도를 사로잡던 시절, 이장호, 배창호 감독이 한국 뉴시네마의 대표적인 기수였다. 그런 이장호 감독과의 인연이 배우로서의 자존감을 갖는 데 한몫한 것 같다. 함께 8편을 작업했는데. =맞다. 이장호 감독님이 그러더라. 이번 영화로 알려졌지만, 계속 이런 이미지로 남을 수는 없다고. 다른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나야 한다고. 다른 제안에 응하지 못한 이유 중에 이장호 감독님이 무명인 나를 스타로 만들어주었으니 다른 작품을 하게 되면 배신이라고 생각한 것도 컸다. 감독님도 내가 ‘자기 배우’라는 생각이 있었고. 그렇게 함께하다보니 신뢰도 커졌다. 감독님 자체가 상업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순수했다. 덕분에 학생들이 연구과제로 삼을 정도로 문제의식을 가진 영화 <바보선언>도 하게 되고, <과부춤> 같은 시대를 벗어나려는 여인상도 보여줄 수 있었다. 워낙 모험심과 도전정신이 강했던 분이라 함께하다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 같다.
-덕분에 이장호 감독과는 열애설까지 있었다. =사실 지금처럼 누가 연애한다고 해서 그렇게 관심이 많지도 않았다. 스타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은 때였다. 지금은 인터넷이고 TV고 들썩이지 않나. 예전엔 매체가 많지 않았다. 일간지 몇곳, <여성중앙> 같은 주부지 몇곳이 전부였다. 기자들 관리하기도 편했다. (웃음) 열애설이 난다고 해도 금방 잊어버리곤 했다.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스탭, 감독, 배우 모두 가족처럼 함께 일했다.
-여배우로서 스타의 위치였다. 정윤희를 주축으로 하는 트로이카 시대의 대를 잇는 이미숙, 원미경, 이보희의 구도를 이루었다. =정윤희 선배 때만 해도 트로이카가 굉장한 경쟁구도였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잘 나와야 하고 잘해야하고 그런 게 눈에 보이게 두드러졌다. 그런데 우리 때는 서로 자기 영역이 확실했다. 시기하거나 터치하지 않고 자기 것만 하는 시절이었다.
-체감지수는 지금의 김태희보다 높지 않았을까. 스타가 귀한 시절이니 더 절대적인 위치이지 않나. =장미희 선배나 이미숙씨 같은 경우 배우로서의 자존이 굉장히 강하다. 배우로 살아야 하고, 또 그런 자세가 참 멋있어 보인다. 근데 난 그게 안된다. 스타의식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여배우다’라는 생각이 별로 없다. 누구는 예전에 톱스타여서 세월이 지나고 나서도 후배들과 경쟁하는 심리가 있다고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과거에 유명했다고 말들 하지만 스스로는 잘 모르겠다. 요즘처럼 쇼프로그램이 활성화된 것도 아니었고, 집에서는 배우를 버리고 살았으니까. 상대 여배우를 이겨야 하는 마음으로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는 마음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를 버릴 수 있는 마음이 있어서 나이 먹어서 배우로 살아가기에 더 편한 거 같다.
-그렇지만 배우로서 자존감이 조금은 필요한 위치가 아니었나. 당시 여배우는 결혼은 곧 은퇴라는 공식이 통용되었던 때였고, 칼로 무 베듯 일을 접어버렸다. 아쉽지 않았나. =아쉬운 걸 몰랐다. 세대 차이인 것 같다. 지금은 내 일이 더 중요하다 여기는데 그때는 결혼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활동을 쉬다보니 많이 그립더라. 정말 소중한 건 떠나봐야 알지 있을 땐 잘 모르는 거다.
-활동을 쉴 때도 기억하고 찾아주지 않았나. =많이 왔었다. 이태원 사장님도 영화하자고 하고. 그런데 자신이 없었다. 겁났다. 다시 시작하려고 하니 잘 안되더라. 그러다 이혼하고 한국 나왔는데 제안이 와서 다시 시작했다. 강수연과 곽지균 감독의 <장미의 나날>, 정보석과 김진해 감독의 <49일의 남자> 같은 작품도 했는데 크게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그 뒤는 계속 드라마에 매진했다. 스크린에서의 다양한 모습에 비해 드라마에서 역할은 팬들에게 별로 어필하지 못했다. =우리 나이의 배우에겐 특별한 연기를 요하는 캐릭터가 없다. 엄마도 다양한 엄마 역할이 많은데 꼭 악한 엄마, 착한 엄마 두 가지밖에 없지 않나. 역 자체가 없기도 하고, 배우를 너무 빨리 늙게 한다. 그래서 역할이 없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론 내가 역할을 소화 못해서 안 시켜주는 것도 있겠고.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겠다. =들지. 그래도 시대의 흐름이 그런 걸 어쩌겠나. 그러니 다 나를 잊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연연해서 감상적이 되고 싶진 않다.
-이번은 워밍업이고 본격적으로 영화도 했으면 싶다. =영화는 항상 찍고 싶지만 쉽지 않다. 이제 다 세대교체가 되지 않았나. 감독도 그렇고, 배우도 요즘 선호하는 이미지가 따로 있으니까. 난 엄마 역할 하는 건 상관없는데 정형화된 엄마가 아닌 캐릭터 있는 엄마라면 싶다. 조만간 스크린에서 만나면 좋겠다. 오늘 이야기하다보니 옛날 생각도 많이 나고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