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은 어딘가에서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썼지만, 이 영화는 근간의 한국영화 중 가장 ‘예쁜’(fair)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사랑의 모든 과정 중에서도 뱃속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사랑이 막 시작하려는 순간들을 아주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는 영화다. 오십년을 넘게 혼자 살아온 한 남자와 그의 나이를 딱 반으로 접으면 닿는 곳에 있는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정한석의 말대로 매우 공정하게(fair) 다루려고 노력한 영화이기도 하다. 관계가 성립되기 이전의 조건들만 놓고 보았을 때 매우 특수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그들의 사이는 ‘연애’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한 이후부터 누구든지 한번쯤은 걸어보았을 그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 길의 수많은 국면들을 포착하는 촌철살인의 대사들, 첫 키스의 순간을 기록해두는 순수함 그리고 흐르는 이미지를 잠깐씩 정지시키는 고운 사진들이 이 영화를 더 예쁘게 만든다. 그렇지만 같은 장소에서 이 영화에 대한 아쉬움 역시 피어난다.
모든 것은 그 손 때문에
그렇다. 모든 것은 다 그 사진 속의 손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형만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먹고 세상을 떠난 친구 기혁을 용서할지 말지를 정하지 못한 채 더 큰 숙제를 하나 떠맡는다. 자기가 죽고 혼자 남은 딸 남은을 매일 가서 봐달라는 것. 형만은 대답하지 못하고 그의 장례식조차 가지 않는다. 하지만 카메라 테스트 촬영을 핑계로 그녀가 살고 있는 집 앞으로 간다. 우유 배달 주머니가 걸린 집. 카메라는 문에서 불쑥 튀어나와 주머니를 잡으려는 손을 잡는다. 형만은 사진을 찍을 때 튀어나온 손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다가 나중에 사진을 통해 그 손을 다시 발견하고 뒤늦게 친구의 부탁을 이행하기 위해 남은을 찾아간다. 그녀는 사진 속으로 불쑥 들어왔던 그 손처럼 그의 삶으로 불쑥 들어선다.
형만은 자신이 고친 카메라를 테스트하기 위해 여태까지 무수한 사진을 찍어왔고 웬만한 작가들보다 사진을 잘 찍는다지만 스스로 작가가 될 생각은 품지 못했다. 그의 다른 사진들에는 스투디움만 있다면 남은의 손이 담긴 그 사진에는 바로 푼크툼이 있다. 그것은 그의 사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형만의 삶도 마찬가지다. 남은을 만나기 이전까지 그의 삶은 그의 사무실만큼이나 아주 잘 정돈된 것이었고, 화려하지 않지만 나름의 완성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다른 이들이 갖지 못한 기술을 가지고 있고, 밥을 같이 먹을 가족/직원이 있으며 잠을 잘 작업장 한쪽이 있었다. 그렇지만 형만의 삶은 자기에게만 몰입되어 있어서 기계 이외의 ‘관계’들,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학작용에는 무심했다. 그런데 남은이 나타나면서 그의 삶의 스투디움은 파괴되었다.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된 듯한 남은의 어수선한 방처럼, 어딘지 미숙하고 불안정하기만 한 이 이십대의 여성은 형만의 삶을 온통 뒤흔들어놓았다. 그들의 우연 같은 만남은 서로를 연결하고 찔러서 상처내면서 원래의 삶을 분산시키고 얼룩을 만들었다. 그들의 감정이 뒤얽히면서 삶도 뒤섞이고 그러면서 그들은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다른 누군가가 되었다.
그때야 기혁이 죽으면서 남긴 마지막 말, “꼭 그렇게 돼”라는 말이 기혁과 형만의 관계를 푸는 말인 동시에 형만과 남은의 관계 아니 이 영화가 모든 관계와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마련한 열쇠임이 드러난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한테 가장 많이 기대고 부탁하고 그래서 가장 힘들게 하고 그래서 가장 빨리 잃게 된다는, “꼭 그렇게 돼” 그 말 속에 ‘페어러브’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녹아 있다.
누구나 다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룰
형만이 남은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다가 자신의 제자에게 ‘내가 부도덕한 짓을 좀 하더라도 여전히 나를 존경할 수 있나?’라며 확인을 받은 뒤 20년 만에 100m 이상을 뛰어 남은에게 달려간다. 그가 말한 100m는 물리적 거리이기도 하지만 남은과 형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온갖 편견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심정적인 거리이기도 하다. 그는 ‘조카’ 남은으로부터 ‘섹시한’ 남은에게 닿기 위해 땀을 흘리고 숨을 헉헉거리며 달려간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한다. ‘너와 내가 함께 있는 것이 남한테 피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문제될 게 뭐가 있느냐는 거지’라는 말로 어렵게 그녀에게 다가간다. 형만을 시종일관 괴롭히는 것은 남은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그녀에게 갈 수 없게 만드는 조건들이며 그것은 그녀의 행동과 말에 귀기울이는 대신 그녀를 그녀의 영역으로 밀어내고 형만을 자신의 영역으로 자꾸만 침잠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형만이 남은에게 프러포즈하는 장면은 전혀 다른 분위기의 영화 <박쥐>의 어떤 지점에서 접속한다. 근친상간적인 관계를 떠오르게 만드는 두 커플의 나이 차이와 친구의 딸/아내라는 금지된 관계의 틀을 깨뜨리려 할 때 남성들이 내뱉는, 별로 로맨틱하지 않으면서도 자기변명적인 대사들이 그러하다. 또 죄의식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남성 인물들과 그로부터 자유로운 여성 인물이라는 점 역시 동일하다. 두 남자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라난 정념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해성사를 하는 것마저도 같다(형만의 고해는 자기만족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상현의 고해는 자신의 정신적 부친마저도 죄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찰나의 접점을 지난 두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남성의 고백과 여성의 수락 이후 <페어러브>는 더 상큼하고 말랑말랑해지고 <박쥐>는 더 정욕적이고 그로테스크해진다.
두 영화는 그 여자를 사랑하면 안되는 그 남자의 위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상현은 사제였고 그 여자 남편의 친구였다. 형만은 나이가 너무 많고 그 여자 아빠의 친구였다. 상현에 비하면 형만의 조건은 금기랄 것도 없어 보이지만 그를 둘러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헤어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 때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남은은 그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그녀가 원했던 답은 아마도 ‘내가 변할게’였는데, 그가 줄 수 있는 답은 ‘내가 잘할게. 잘해줄게’여서 였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안에서 그들의 연애를 파탄에 이르게 하는 룰은 사회적인 것이나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나 속시원히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남은을 만나기 이전의 형만과 같은 상태에 있는 이라면, 전혀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 모호함이 이 영화를 ‘예쁜’ 상태에 머물 수 있게 한다.
욕망의 잔영만이 드러나다
<박쥐>의 커플을 보고 상당히 거북했을 이들도 <페어러브>를 보면 사랑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상현과 태주의 사랑이 참고 보아주기 힘든 욕망의 밑바닥을 훑고 다녔다면, 형만과 남은의 사랑은 몇겹의 필터로 걸러서 남은 욕망의 잔영들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형만은 남은을 섹시하다고만 말할 뿐 섹스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삭제된 것인지 원래 존재하지 않은 것인지 관객은 알 수 없다. 시청각적인 표면상에서 가장 거슬리는 요소라고 해봐야 안성기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주는 ‘응, 오빠야’일 정도로(그것도 몇번 듣다보면 묘한 중독성이 있다), 영리한 감독은 형만과 남은 사이의 성적(性的)인 것들을 교묘하게 거세해놓았다. 그래서 그 둘은 어떤 순간에는 아주 사이좋은 부녀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설정은 아주 센세이션하지만 이미지와 사운드는 매우 정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일상적이지 않다고 상정된 관계에 잠재된 일상적 감수성들을 뽑아내는 데 아주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관객은 지극히 평범한 나의 연애가 지극히 일탈적으로 보이는 화면 속의 연애와 별로 다르지 않은 감정선을 타고 흘러간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대상을 선정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감독의 마음결이 느껴진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작품이 관계의 표피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페어러브>의 스투디움은 정말 ‘페어’하지만 아름다운 화면과 음악들 사이로 감각의 피부를 찢으며 마음을 관통하는 푼크툼이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