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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아날로그 필름, 아직도 발전중이다”
김성훈 사진 최성열 2010-02-02

디지털 급성장 속에서도 후지필름 고감도필름 출시

1월25일, 잠실 롯데월드 롯데시네마에서 열린 후지필름 신제품 발표회가 열렸다.

패션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최근 현장에서 가장 ‘핫’한 아이템 정도라고 할까. <국가대표>(2009)로 첫 선을 보인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대세가 된 레드원 카메라 말이다. 요즘엔 드라마 <추노>를 찍은 카메라로 더 유명하다. 이후 이 카메라로 안 찍은 영화를 세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레드원 카메라는 충무로의 유행이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필름에 비해 적은 비용으로 필름과 비슷한 화질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충무로가, 특히 10억원 내외의 저예산상업영화들이 너도나도 앞 다투어 이 카메라를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건지도 모른다. 그만큼 디지털이 급성장했다.

풍부한 명암과 색 구현하는 ‘이터나 비비드 500’

지난 1월25일, 잠실 롯데월드 롯데시네마에서 열린 후지필름 신제품 발표회가 다소 비장하게 시작된 것도 그래서다. “최근 디지털 산업이 성장하면서 필름 업계가 다소 위축된 것은 사실”이라는 최승돈 후지필름 이사는 “이번에 선보일 신제품 ‘이터나 비비드 500’(ETERNA Vivid 500)을 통해 필름이 다시 영화산업의 중심에 서게 되었으면 한다”는 말로 행사를 열었다. 그러니까 필름 업계 스스로 디지털이 필름을 따라잡았음을 인정하고, 다시 한 발짝 앞으로 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또 이번 행사는 그간 한국 영화용필름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보인 코닥의 아성에 도전하겠다는 후지의 출사표이기도 하다.

확실히 이터나 비비드 500은 고감도필름으로서 훌륭했다(‘500’은 필름감도로, 빛에 반응하는 정도를 뜻한다. 숫자가 높을수록 고감도라 불린다). 한국의 황기석, 윤주환 촬영감독과 미국촬영감독협회의 페든 파파마이클, 클레이머 모겐타우, 디온 비비 촬영감독이 만든 테스트 영상을 본 결과, 다른 필름에 비해 색 재현 능력이 월등히 뛰어났다. 광량이 적은 해질녘이나 새벽에도 피사체가 가진 색을 선명하게 살려내는가 하면, 어둠 속에서도 미세한 밝음과 붉은 립스틱 색 등을 모두 표현할 줄 안다. 또 적은 광량으로도 밤장면 촬영이 가능할 정도로 계조가 풍부하다. 한마디로 밝음과 어둠의 큰 대비 속에서도 높은 채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고감도필름의 단점을 극복했음을 의미한다. 보통 입자가 굵어서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감도필름은 색이 필름 위에 완전히 입혀지기도 전에 상이 맺히는 경우가 많다. 고감도필름이 채도가 낮은, 무채색 느낌이 강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번 신제품을 통해 “기존의 것에서 한 단계 진화했다”는 윤주환 촬영감독은 “무엇보다 밝음과 어둠, 그리고 색을 효과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필름누아르 장르에 적합한 필름”이라고 말했다. 역시 테스트 촬영을 해본 디온 비비 촬영감독(<콜래트럴>(2004), <마이애미 바이스>(2006) 등 촬영)도 이에 동의했다. “전체 조명 없이도 섬세한 그림자까지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어둠을 얻을 수 있었다.”

필름의 고비용 문제, 해결 가능할까

이처럼 촬영감독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지만, 여전히 레드원 카메라와 같은 디지털 매체에 쏠려있는 게 충무로의 현실이다. 이에 필름 업계는 디지털에 대항하기 위해 몇몇 자구책을 마련했다. 지난해 11월, 필름 비용을 줄이기 위해 후지필름이 한국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촬영감독협회와 함께 실시한 ‘3P’(Perforation) 테스트가 그중 하나. 3P는 이런 식이다. 필름 한 프레임에 구멍이 좌우 4개씩 있다. 퍼포레이션이라는 이름의 이 구멍을 좌우 3개로 줄이면 어떻게 될까. 줄어든 면적만큼 프레임 숫자가 늘어난다. 그러니까 사용할 수 있는 프레임의 숫자가 많아진다는 말이다. 물론 전제조건이 있다. 카메라에 필름을 끼우는 부분인 게이트 역시 4개에서 3개로 개조해야 한다. 이렇게 개조하면 후반작업비용이 약 30% 절감된다는 게 테스트의 결과다. 또 4P에 비해 화면의 좌우가 늘어나 시네마스코프(2.35:1) 작업에서 효과를 볼 수 있다. “원래 시네마스코프용으로 개발된 것은 아닌데 3P는 이미지의 손실없이 시네마스코프를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 장점을 발견”했다는 게 영진위 기술사업부 조성민씨의 말이다. 3P는 필름을 사용하고 싶지만 제작비 때문에 고민하는 프로듀서와 촬영감독들에게 또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실제로 3P로 필름 비용 절감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영화가 있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전쟁영화 <포화 속으로>와 원빈의 신작 <아.저.씨>가 바로 그것. “보통 400자 필름을 사용하면 3분50초 정도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3P를 적용해보니 5분50초, 그러니까 2분 정도 더 쓸 수 있더라”라는 최명기 프로듀서는 “필름 관련 비용이 30% 절감됐다”고 만족해했다. 하지만 3P가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카메라 한대당 개조비용 7천만원을 부담해야 하고, 4P에 최적화된 극장 영사기에 맞추기 위해 D.I.(Digital Intermidiate: 디지털 후반작업)는 필수다.

신제품 개발, 필름 비용 절감방법 등 필름 업체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영화인들은 무조건 디지털을 선택하는 풍토를 경계한다. 비용이 싸다는 이유로 말이다. <박쥐>(2009),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의 정정훈 촬영감독은 “작품의 퀄리티를 위해 어떤 카메라가 잘 어울리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카메라 선택에는 반드시 미학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디지털이 계속 성장하는 것처럼 필름 역시 신제품이 계속 나오고 있다. 신제품을 써봐야 더 나은 필름이 또 나오는 게 아닌가”라고도 했다. 그만큼 작품의 질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작품인 <달빛 길어올리기>(2010)를 디지털로 촬영하고 있는 황기석 촬영감독 역시 “장르에 맞는 카메라를 선택하는 게 평범한 진리”라고 강조했다. 촬영방식에 적합한 매체를 골라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포화 속으로>의 경우 추운 겨울에 로케이션 촬영이 많다보니, 온도에 굉장히 민감한 레드원 카메라보다 필름카메라가 더 적합하다”는 게 최명기 프로듀서의 설명이다.

작품에 따라 필름과 디지털 혼용되어야

디지털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되었다.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현상, 인화, 텔레시네 등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필름보다 비교적 간단한 공정의 디지털이 더 매력적일 수 있다. 위축된 충무로의 투자환경에서 한푼이라도 더 깎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고 필름이 사라질 것이라는 성급한 판단을 내려서도 안된다. 디지털과 필름, 필름과 디지털 모두 창작자에게는 중요한 도구이고, 관객에게는 다양한 볼거리다. 그런 의미에서 후지필름의 와타나베 히로시 국제마케팅 매니저의 말이 떠오른다. “디지털이 대세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아날로그 필름에 대한 지지층은 굳건하다. 그래서 앞으로도 디지털과 필름이 공존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아날로그 필름의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