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다이어리’라는 게 있다. 10년을 하루같이, 매일 같은 날짜 아래에다가 일기를 적는 다이어리다. 백과사전만한 두께일 것 같지만, 뜻밖에도 날씬하다. 그만큼 띄어쓰기 없이 빼곡하게 적어야만 한다는 뜻이며, 동시에 하루만 빼먹어도 이가 빠진 듯 보기가 흉하다는 뜻이다. 이 다이어리의 장점은 한해 두해 지나면서 지난해 같은 날 무슨 일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생이 더 나아졌는지, 더 나빠졌는지. 그러자면 어쨌거나 빈칸 없이 매일 써야만 한다는 점. 매일. 그것도 10년 동안 꼬박.
지난해에 나는 충동적으로 그 다이어리를 샀다. 매주 내게 신상 정보를 메일로 보내주는 한 사이트에서 1+1 행사를 하더라. 그러니까 도합 20년 분량. 1+1에 현혹돼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했는지 알아차리는 데 걸린 시간은 한달이 채 못 됐다. 매일 일기를 쓰는 건 별로 힘들지 않았다. 정작 힘든 건 앞으로 20년 동안 매일 일기를 써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20년 뒤를 상상해봤다. 환갑이로구나. 잔칫상 위에 올려놓은 20년치 일기를 보면서 손자가 질문하겠지. 지난 60년 세월을 돌이켜보신다면? 그중 반은 학교에 다녔다(“그렇다고 공부를 좋아했다는 뜻은 아니란다”). 그리고 3분의 1은 꼬박 일기를 썼다(“1+1은 절대로 안된다. 우리 집안에서는 쌍둥이도 안된다”).
1+1에 현혹되지 말기를
실패는 지혜를 낳는다. 살다보면, 그럭저럭 나 같은 사람에게도 지혜가 생기는데, 그것들은 다 내가 행한 미친 짓들에서 얻은 교훈의 결과다. 하지만 멍청한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더 로드>에 대한 사람들의 평을 읽다가 별 반개짜리 가혹한 감상평을 발견했다. 대학에 떨어진 뒤, 기분 전환하려고 극장에 갔다가 그만 그 영화를 본 것이다(“왜 그랬을까? 1등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이 박살나는 걸 보러 갔을 테지”). 하지만 영화 속 세상은 이미 박살난 뒤다. 재앙 같은 게 일어났다면 아마도 그 낙방생의 마음속에서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러니 별 반개를 다는 심정도 이해간다. 그럼에도 교훈은 남는다. 앞으로는 재앙이 일어나기 전부터 시작하는지, 재앙이 다 끝난 뒤의 이야기인지 잘 알아보고 표를 끊자. 역시 실패를 통해 우리의 지혜는 무럭무럭 자란다.
이 평에는 “너도 아비가 되어봐라”라는 답글이 붙었더라. 그 학생의 아버지가 쓴 답글이라면 참 훈훈한 부자애라 하겠지만, 그럴 리가. 대학시험에 떨어진 뒤 모두 다 죽어버리는 영화를 보면서 마음을 달래려고 극장에 갔다가 <더 로드>를 보게 된 학생에게 이보다 더 치졸한 답글이 있을까나. 실연해서 징징대는 아가씨한테 “너도 애 낳아봐라! 뭐가 더 아픈가”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렇긴 해도 나는 그 답글에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근거는 빈약하다. 그건 치졸하기 때문에 진실되게 들린다. 아비가 되어보니 정말 경험으로 알 것 같다. 치졸하게 느껴질 때, 그건 진실일 가능성이 많다. 예컨대 그간 친구는 하나마나 한 얘기와 갖은 그래프로 이 지면을 채웠는데, 원고의 그런 치졸한 형태 자체가 그 친구의 진실이라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는 나는 인생의 진실을 맑고 밝고 아름다운 언어로 말씀해주시는 분들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다. 예를 들어 “열심히 노력하면 우리는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누군가가 말씀하신다고 치자(에잇, 그냥 그분이라고 치자). 그건 강장동물의 소화기관처럼 투명하고 올곧은 말이다. 구불구불 사하천을 일직선으로 쭉 펴놓은 것과 마찬가지란 뜻이다. 하지만 아비가 되어보니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그런 말들이 의심스럽게 여겨진다. 거기에는 치졸함이 너무 없지 않은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다 부자가 된다면 부자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게?”라는 말에는 좀 구차한 느낌이 든다.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너희들이 암만 해봐라. 그때 우리는 꽃놀이하고 있다더냐?”라면 좀 치졸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셋 중에는 이게 제일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아비가 되어보니…
오해는 마시라. 나는 지금 아비가 되어보니 알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말해주기 위해서 나는 조금 더 구차해지고 치졸해져야만 하겠다. 곧고 투명하고 아름다우나 허망한 말들은 당장은 대학에 떨어진 학생을 위로해줄 수 있겠지만, 그걸 인생의 지혜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진짜 지혜는 시간이 흐른 뒤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게 되는 것들이다. 우리 앞에 기다리는 건? 예정된 수많은 실패들. 그럼에도 정상적인 남자라면 아비가 되리라는 것. 우리가 대통령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아비는 될 테니까. “너도 대통령이 되어봐라”라는 말은 진실이 될 수 없지만, “너도 아비가 되어봐라”는 진실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로드>에서 아들이 가장 경멸의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볼 때는 음식이 든 손수레를 훔쳐간 흑인을 붙잡은 뒤, 그의 옷과 신발까지 다 빼앗아버릴 때다. 그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죽고 난 뒤에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아들은 그걸 도무지 알아듣지 못한다. “너도 아비가 되어봐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오지만 꾹 참고 둘은 흑인이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돌아가보니, 이건 안 가본 것만 못하다. 벌거벗은 흑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찝찝함과 석연찮음.
이 찝찝함과 석연찮음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느껴진다. 남녀와 아이 둘. 가족이라고 말하면서 소년을 환영한다. 그리고 영화 끝. 내가 대학에 떨어진 사람이었다면, 스크린을 향해서 신발이라도 던졌을 만한 그런 엔딩. 아무튼 찝찝하고 석연찮다. 그 부부는 아이들만 골라서 잡아먹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도처에 식인무리들이 출몰하는 세상에서 아이를 둘이나 건사하고 다니는 억척부부일 수도 있다. 그들과 같이 남쪽으로 간다고 결심할 때, 아들은 이런 찝찝하고 석연찮은 마음을 안고 가야만 한다. 그 ‘로드’가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구나 걸어야만 하는 길을 은유하는 것이라면, 내가 보기에는 여기까지가 <더 로드>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실패한다고 해서 그게 모두 내 잘못은 아니다. 처음부터 성공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비가 되어보니 그렇다. 무엇보다 1+1에 현혹되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