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부터 두드러기 때문에 고생이다. 가려워서 긁으면 긁는 대로 빨간 돌기가 돋는 증상인데, 등에서 시작하더니 배와 허벅지, 팔뚝으로 마구 전이되고 있다. 환부를 본 정한석이 에이 더러워, 투의 표정을 지었던 걸 생각해보면 흉측하기도 한 모양이다. 미루다가 어쩔 수 없이 찾아간 내과에서는 ‘일단 알레르기 같은데 두고보자’고 말한다. 알레르기라…. 평소 먼지에 민감한 코 말고는 별다른 알레르기가 없었는데 이상하다.
그래서 상상력을 보태 생각을 해봤다. 이 알레르기라는 건 어떤 상징이 아닐까.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세경이가 느낀 지훈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사랑니 앓이로 연결됐던 것처럼 심리적 상황이 육체에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의심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 경우에는 편집장이란 자리에 대한 심리적 알레르기 반응이 두드러기로 물리적 ‘시위’를 하는 느낌이랄까. 그럴 법한 게 난 어릴 때부터 ‘장’(長)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 어디 나서서 반듯한 주장을 펼칠 줄 아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장’을 맡는다는 건 두려움의 영역이기도 했다. 하긴 반장은 모든 아이들이 꺼리는 고3 때 딱 한번 맡았다. 그것도 친구들의 지지가 아니라 ‘핵주먹’이란 별명을 가진 담임의 지시에 의해서. 대학 시절에는 한 학기 동안 과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군대에 가지 않았거나 취업, 고시, 대학원 준비를 하지 않았던 게 나뿐이라 후배와 선배들이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얼렁뚱땅 맡게 됐지만 편집장이라는 자리는 반장이나 과회장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장’ 같다. 정말 능력있는 자가, 일에 대한 욕심과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일 같다. 취재팀장이라는 ‘2인자’ 시절에는 대충 결정을 내린 뒤 편집장의 최종 결정을 기다리면 됐다(그 결정이 훌륭하면 침묵하고, 안 좋아 보이면 뒷담화를 날리면 된다). 그런데 뒤에 아무도 없는 자리에 앉고 보니 덜컥 겁이 난다. 과연 내가 이 정도 그릇일까. 전임자였던 조선희, 안정숙, 허문영, 김소희, 남동철, 고경태 선배의 발꿈치나 따라갈 수 있을까. <씨네21>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건 아닐까. 뒤늦게 고민이 된다. 고경태 전 편집장이 평소 성격대로 후다닥 특공작전을 치르듯 순식간에 사의를 표하고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고사하거나 한참 속앓이를 하며 숙고했을 것 같다. 두드러기는 그런 성급한 결정에 대한 몸의 경고인지도 모른다.
아직 앞으로의 편집 방향도 잡히지 않았고 다가올 개편의 윤곽도 어슴푸레하다. 허망한 각오조차 함부로 뱉을 수 없을 것 같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뿐이다. 그저 ‘10년 영화기자면 편집장 풍월을 읊는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참신한 아이디어와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씨네21>의 새 지평을 연 고경태 전 편집장께 고생하셨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ps. 주성철, 김도훈 기자의 ‘조언’대로 <셉템버 이슈>는 꼭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