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빈과 슈퍼밴드2>를 보다가 잤다. 영화가 끝날 때쯤 몸이 개운해질 정도로 푹(!) 잤다. 함께 본 열살짜리 딸은 혀를 끌끌 찼다.
딸은 대신 <아바타>를 보다가 잠들었다. 애초에 보기 싫다고 투정을 부렸던 터다. <아바타>의 나비족보다는 <앨빈과 슈퍼밴드2>의 햄스터 주인공들이 훨씬 멋지단다. 그러자 세살 위 오빠가 한심하다고 면박을 준다. “야, 너는 <씨네21>에서 별점을 죄다 다섯개씩 받은 영화를 그렇게 몰라보냐?” 아들은 <아바타>를 두번이나 봤다.
외화 흥행사를 다시 쓰는 <아바타>를 무시하는 건 세상물정 모르는 꼬마만이 아니다. 2주 전 <아바타>를 둘러싼 대담에서도 부정적 견해가 나왔다. “잘 만든 흥행영화이긴 하나 기념비적으로 훌륭한 영화라고 말하기엔 내러티브가 진부하다”는 게 요점이었다. 전영객잔 필자인 정성일 평론가의 말은 더 세다. 그는 3주 전엔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다음 후졌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라고 썼다. 이번호 전영객잔(92~98쪽)에선 더 길고 혹독하게 공격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어보시길.
<아바타>에 대한 비(非)평론가들의 비판 중 눈에 띄었던 것은 어느 장애인단체 대표가 <한겨레>에 기고한 독자칼럼이었다. 그는 왜 주인공이 휠체어 장애인으로 설정됐는지 물으며 감독의 편견을 의심했다. “(주인공 제이크가) 장애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불행하다고 느끼고 장애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고 전제했기에 …(중략)… 제이크가 나비족 원주민들과 동화되기를 원한 것은 사랑과 평화에 대한 본능과 윤리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제이크가 꿈에서 깨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역시 장애의 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란 추측이 가능해진다.” 옳고 그름을 떠나, 전혀 떠올려보지 못한 분석틀이었다. 난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휠체어 장애인이 아니라서?
비슷한 측면에서 이번호 황진미 평론가의 글(90~91쪽)도 어떤 각성을 준다. 그는 <용서는 없다>의 복수방식에 분노를 표했다. 극중 이성호(류승범)는 누나가 당한 성폭행에 분개한다. 하지만 그 초점은 여성의 고통이 아니라 남성의 굴욕이다. 왜 남의 여자를 똑같은 방식으로 공격해 앙갚음하냐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수긍이 간다. 한국에서 베트남 신부 매매혼이 한창 문제될 때 진보적 시민단체의 남성 활동가들조차 이런 농담을 했다. “베트남 시골에도 ‘한국인 신부 도망가지 않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걸어야 해.” 나는 왜 <용서를 없다>를 보면서 그런 문제의식을 못 느꼈을까. 남자라서?
존재가 의식을 지배한다는데, 직장생활 20년 중 지난 1년3개월을 가장 특이한 존재로 보냈다. 영화잡지에 적을 두기는 매우 낯선 경험이었다. 영화지 편집자의 시각으로 세상과 사물을 보려 했지만 모자람투성이였다. 이제 그 존재에 스스로 마지막 사인을 보낸다. “캇!!”(cut) 떠난다. 다음호부터 이 지면은 문석 팀장이 이어받는다. <씨네21> 10년지기이자 영화계 안에서 실무경험까지 익혔던 그가 바꿀 <씨네21>에 큰 기대를 건다. 독자들께 고마움의 인사를 전한다. 굿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