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추천: 니콜라스 뢰그의 <쳐다보지 마라>
Don’t Look Now 니콜라스 뢰그 | 도널드 서덜런드, 줄리 크리스티 | 1973년 | 110분 | 미국, 이탈리아
빨간 코트를 걸친 딸아이가 강가에서 혼자 놀고 있고, 그와 멀지 않은 집에서 교회 슬라이드 사진을 꼼꼼히 살펴보던 벡스터(도널드 서덜런드)는 잔을 엎지르면서 피 같은 얼룩이 슬라이드 표면에 번지자, 불현듯 밖으로 달려나간다. 물에서 이미 죽어버린 딸을 건져올려 울부짖는 벡스터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이 인상적인 오프닝은 강박관념과 죄의식이라는 테마를 풍부한 시각적 암시와 상징으로 묘사한다. 히치콕이 할리우드에서 만든 첫 번째 영화 <레베카>(1940)의 원작자로도 유명한 다프네 드 모리에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부부는 베니스로 이사를 가 슬픔을 잊어보려 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심령술사 여성과 그 언니를 만나면서 그 아픔은 좀더 불길하게 번져간다. 심령술사가 죽은 딸의 영혼과 만나게 해준 것. 이런 음울한 환상과의 조우는 맨해튼의 아파트로 이주해 한 노부부와 가깝게 지내던 <악마의 씨>(1968)의 로즈마리 부부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불길하고도 강렬한 힘을 강화하는 것은 파격적인 교차편집이다. 그럼으로써 니콜라스 뢰그는 영화 속 인물들만큼이나 관객으로 하여금 보는 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 기묘한 마술을 부린다. 특히 두 부부의 갑작스런 정사신은 영화역사상 가장 이상하고도 매력적인 정사신이라 해도 좋을 만큼 인상적이다. 낭만의 도시로 그려지던 베니스를 시체와 유령의 도시로 만든 음습한 공기도 계속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물론 그 어느 것도 예상 못한 반전에 비할 바 아니지만.
홍상수 감독의 추천: <오데트>
Ordet 칼 드레이어 | 한 아그센, 크리스틴 안드레센 | 1955년 | 126분 | 덴마크
보르겐 농가의 둘째아들 요하네스(프레벤 레도로프 라이)는 정신이 쇠약해진 뒤 자신이 예수라고 생각하며 여기저기서 성경구절들을 인용해 설교한다. 한편, 셋째아들 안데르스(케이 크리스티안센)는 종교적으로 대립되는 재단사 집안의 딸과 결혼하려 한다. 어느 날, 임신 중이던 장남 미켈(에밀 하스 크리스텐센)의 아내가 출산 도중 의식을 잃고, 보르겐가에는 신앙의 위기가 찾아온다.
목사이기도 했던 극작가 카이 뭉크의 <말씀>을 원작으로 삼은 <오데트>는 믿음에 관한 영화다. 아버지는 요하네스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지만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주변에서는 그래도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럼 여기서 기도를 멈춘다면 그때까지의 오랜 기도는 모두 물거품이란 얘긴가. 믿음에 회의를 지닌 냉소적인 아들과 다른 신을 섬긴다는 이유로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양쪽 집안의 아버지들. 그렇게 <오데트>는 믿음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흑백 영상에다 주로 실내 공간에서 촬영했지만 그 빛과 인물이 오가는 구도는 그야말로 경건하다. 믿음 없는 세상에서 바라보는 칼 드레이어의 최고 걸작.
봉준호 감독의 추천: 존 부어맨의 <서바이벌 게임>
Deliverance 존 부어맨 | 존 보이트, 버트 레이놀스, 네드 비티 | 1972년 | 110분 | 미국
네 남자가 급류 카누 여행을 떠난다. 댐 건설로 말미암아 수면 아래로 사라지게 될 강 주변 마을에서 그들은 남자다움을 시험하지만 곧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끔찍한 악몽으로 변한다. 에드(존 보이트)가 숲에서 변태적인 마을 주민 두명에게 성폭행당하기 직전 루이스(버트 레이놀스)가 활을 쏘아 한명을 살해한 뒤부터 예기치 않은 위기가 계속되는 것.
영화는 유려한 풍경의 강 상류로 시작하지만 이내 폭파와 벌목 등 개발장면을 군데군데 삽입한다. 곧 수몰될 자연과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면서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스러져가는 인물들의 모습이 무척 상징적이다. 패기 넘치는 영국 감독이 비판적 시선으로 완성한 영화이기에 댐 건설을 둘러싼 파괴의 풍경은 ‘위대한 미국’이라는 허울 좋은 신화와 자연스레 겹친다. 밴조를 연주하는 정신지체 소년, 내부를 들여다보기 힘든 숲의 정경은 그 어느 영화보다 음산하고 공포스럽다. 와이드스크린으로 담아낸 급류 강 장면이 감탄을 자아내며 서서히 광기에 휩싸여가는 존 보이트와 버트 레이놀스의 모습은 단연 압권.
오승욱 감독의 추천: 조셉 로지의 <트로츠키 암살>
The Assassination of Trotsky 조셉 로지 | 알랭 들롱, 리처드 버튼 | 1972년 | 103분 |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트로츠키 암살>은 실제 1940년 8월 멕시코에서 살해당한 유랑의 혁명가 트로츠키의 마지막 몇달간의 기록이다. 스탈린은 자객을 보내 트로츠키의 암살을 지시했고 결국 날카로운 등산용 지팡이인 피켈로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사건에 이르기까지 비어 있는 시간들을 조셉 로지 특유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했다. 그것의 가장 극명한 예는 트로츠키 암살을 위해 보내진 자객, 심지어 알랭 들롱이 연기하는 ‘프랭크 잭슨’의 존재다. 그는 또 다른 트로츠키 신봉자 여성을 유혹해 트로츠키 일가에 접근한다. 레인코트를 입고 트로츠키의 주위를 맴돌다, 결국 스스로 번뇌에 빠져 자신의 임무에 갈등하는 그의 모습은 스탈린이 아니라 장 피에르 멜빌이 보낸 킬러 같다. 아니, 예정된 운명 앞에 심각한 회의와 비탄에 휩싸인 햄릿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잭슨이 여자와 함께 투우를 보러 간 장면이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소의 모습은 누가 봐도 트로츠키에 대한 은유다. 그 음산하고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와 음악은 압도적이다. 이처럼 표현주의적인 장면들이 뒤섞인 영화를 보다보면 마치 조셉 로지가 남미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과 만난 것 같은 느낌이다. 트로츠키만큼이나 그 역시 지역적 감성에 녹아들었던 걸까. 그렇게 조셉 로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영화를 하나의 ‘의식’처럼 완성했다.
류승완 감독의 선택: 왕가위의 <열혈남아>
旺角下問 왕가위 | 유덕화, 장만옥, 장학우 | 1987년 | 94분 | 홍콩
건달 소화(유덕화)에게는 창파(장학우)라는 고향 후배가 있는데 늘 말썽만 부려 골치다. 그러던 중 란타우섬에 살고 있는 아화(장만옥)라는 먼 친척이 찾아온다. 왕가위 감독 스스로도 밝혔듯 <열혈남아>는 홍콩 누아르라는 선배들의 자산 위에 마틴 스코시즈의 <비열한 거리>(1983)와 <천국보다 낯선>(1984)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장학우는 충동적이고 다혈질인 <비열한 거리>의 자니 보이(로버트 드 니로)와 닮았고, 장만옥의 존재는 잠시 함께 머물다 떠나간 <천국보다 낯선>의 사촌 여자 에바(에스터 벌린트)와 비슷하다.
왕가위의 데뷔작 <열혈남아>를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다만 상영 버전은 기존에 개봉한 대만 버전이 아닌 홍콩 버전(감독판)으로 엔딩 등 일부 장면이 다르다. 그래서 왕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다는 게 아쉽고 유덕화와 장만옥이 마지막으로 만나는 엔딩은 포함돼 있지 않다. 그럼에도 유덕화가 장학우의 복수를 위해 포장마차에서 펼치는 스탭프린트 ‘활극’ 등의 감동은 여전하다. 시작은 선배 영화들로부터의 탈주였으나 이후 아시아 감독들에게는 또 하나의 ‘전범’이 된 청춘잔혹 영화.
최동훈 감독의 선택: 더글러스 서크의 <바람에 사라지다>
Written on the Wind 더글러스 서크 | 록 허드슨, 로렌 바콜 | 1956년 | 99분 | 미국
석유회사 사원 미치(록 허드슨)와 난봉꾼인 젊은 사장 카일(로버트 스탁)은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다. 미치는 방계 회사의 비서인 루시(로렌 바콜)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카일을 택하고 미치는 친구를 위해 물러선다. 하지만 루시의 불임으로 카일은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고, 급기야 루시를 싫어하는 카일의 여동생은 미치가 자신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자 가까스로 임신한 루시의 상대가 미치라고 카일에게 말한다.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영화는 당대 그 누구의 멜로영화보다 낭만적이고도 화려한 세트를 선보였지만, 결코 그 낭만성에 잠식당하지 않았다. 가령 <바람에 사라지다>에 등장하는 인공호수의 외관을 보라. 공간이 화려할수록 인물들의 비극성은 더욱 강조됐다. 무엇보다 그의 영화들은 수많은 현대 감독들이 리메이크에 공을 들일 만큼 세련된 태도와 기품을 품고 있었다. 본질적으로 당시 가부장적 사회와 문화에 대한 비판을 내재하고 있으면서 또한 당대 최고의 흥행작들이기도 했다.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1955)과 더불어 더글러스 서크의 최고 걸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