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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강동원이라는 페티시!

의로운 전우치를 이렇게 망가뜨린 우리 시대의 요구는 무엇일까

저게 사람 얼굴이야, 뭐야? <아바타>를 보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전우치>의 강동원을 보고 나오게끔 되어 있는 탄성이다. 옥황상제로 분하고 하늘에서 내려올 때 강동원은 ‘강림’한다. 홍길동과 양대 산맥을 이루는 전우치라는 소설적 인물은 희박하게 배경으로 있고, 강동원의 영화적 스타적 존재감은 크게 설정되어 있다.

<형사 Duelist> <M>의 강동원에 대한 카메라 탐닉에 이어 <전우치>에서도 그에 대한 패션(passion)과 패션(fashion)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영화감독의 이름이 최동훈일까, 이명세일까, 잠깐 헷갈리는 사이 전우치의 도술은 현대에 와 강동원이 거리 패션 및 화보 패션의 주인공으로 자유자재로 변모하는 데 주요하게 쓰인다. 도술의 잡술화! 강동원이라는 페티시!

여배우들은 스크린상에서 마이너리그

영화이론에서 많이 다루는 것이 페티시다. 여성의 거세, 차이를 부인하는 대체, 치환물로서의 페티시는 영화에서 대부분 여성 격이다. 예컨대 조셉 폰 스턴버그 영화는 이러한 페티시적 관음증을 다루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거꾸로 영사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 관객이 캐릭터와 스토리에 얽매이지 않고 스크린 이미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페티시적 영화에서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통제적인 시선이 없다. 조셉 폰 스턴버그 영화 중 마를렌 디트리히가 나오는 <모로코>가 대표적이다.

물론 <전우치>와 <모로코> 사이엔 12세 이상 관람가와 어른을 위한 영화라는 차이 이상이 존재함을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떤 영화들은 스포일러라는 비난을 무릅쓰고서라도 플롯을 밝히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지만 <전우치>는 아니다. 스포일러 주의보 해제.

<여배우들>, 이 배우로서의 여자, 여자로서의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20대에서 60대까지 펼치는 사이에 <전우치>는 500년에 걸친 전우치, 강동원의 매력을 전시한다. <여배우들>이 정열적으로 어떤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반면에 <전우치>는 백윤식, 김윤석, 송영창, 주진모(연극배우) 등의 조역배우들이 강동원을 띄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게다가 염정아가 영화 속 영화의 여배우로 등장해 전우치의 미움을 받고, 난데없는 타이 전통 옷과 관을 쓴 채 뛰어다닌다. 이후 임수정이 대역배우로 등장하지만 조금 하다 만다. 영화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배우는 강동원뿐이다.

이렇게 연기 경력이 있는 남자배우들을 미남배우를 에워싸고 내려치고 할퀴는 조연(요괴 역)으로 등장시키는 패턴은 보이그룹, 걸그룹과 달리 이즈음의 한국영화가 다양한 남성 관객층과 여성 관객층에 접근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씨네21> 문석 기자가 2010년 여배우들의 구직난을 예견하는 기사에서 밝힌 것처럼 2010년은 전쟁영화, 남성 액션영화가 주를 이뤄 이러한 패턴이 더욱 견고해질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원빈, 양익준이 등장하는 이정범 감독의 <아.저.씨> 등이 그 범주에 해당할 것이다. 이 지형으로 보면 여배우들은 스크린상에서는 마이너리그다.

블록버스터로서도 그리 야심적이지 않아

<여배우들>에서처럼 뛰어난 여배우들이 많은데 <전우치>의 강동원에 버금가는 다채롭고 과도하게 영화 안에서 카메라의 애정을 받은 단독 여배우의 경우는 없는 것 같다. 근접한 경우가 <마더>의 김혜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카메라의 탐닉, 연기자의 배열로 여배우의 연기가 돋보이는 경우는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고현정, 정유미, 엄지원과 같은 여배우들이 자가당착, 자기연민, 자신에 대한 성찰 등을 정밀하게 표출하지만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히스테릭한 집합적 여성상에 가까워진다. 예의 여배우 구직난 기사는 2010년 여배우들은 TV, 남자배우들은 영화라는 매체와 젠더의 이상한 분배를 예견하고 있다.

<워낭소리> <똥파리> 같은 독립영화를 제외하고 보면 올해 박스오피스 <해운대>의 특징을 이전 블록버스인 <실미도> 등과 다른 순백 오락의 표명이며 탈정치성이라고 볼 때, 이 수상한 시절, 남자 배우들만 떼지어 출몰하는 현상이 예사롭지 않다. 더구나 이렇게 다수 출연하나 사회를 위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건 더 이상하다.

특히 남자 배우들이 열연을 펼쳐는 영화가 열혈남아며 정의의 사도인 전우치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전우치는 역사적으로 실존했으나 언제, 어디서인지는 불분명한 인물로 남아 있다.

<전우치전>은 이본도 많지만 이중 한문본을 토대로 형성된 일사본계를 중심으로 소설과 나란히 줄거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시대 송경 숭인문 안에 사는 전우치는 높은 스승 밑에서 선도를 배워 오묘한 이치를 깨치고 신기한 재주를 얻었으나 숨어 지낸다. 반면 일사본에서는 여자로 변신한 여우(여인)와 구미호에게 각각 구슬과 천서를 빼앗아 도술을 획득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해적이 난무하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참혹한 지경에 빠졌는데도 나라에서 백성을 돌보지 않자 격분한 전우치는 천하로 집을 삼고 백성으로 몸을 삼으리라 결단한다. 전우치의 둔갑술과 도술은 도적의 토벌, 가난한 선비의 구제, 가난한 백성을 원조하는 데 쓰인다. 반면 영화 <전우치>에서 전우치는 장난질과 망나니 사이를 오갈 뿐이다. 둔갑술과 도술은 컴퓨터그래픽, 와이어 액션을 사용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홍길동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의로운 전우치를 이렇게 망가뜨려야 하는 우리 시대의 요구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 자체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케 하는 시대성은 무엇일까? 그 반시대성은 어떤 것일까? <전우치전>을 부활시키는 대신 영화 <전우치>를 박스오피스에 빠르게 올려놓는 욕망은 무엇일까? 반면 블록버스터로서의 <전우치>는 그리 야심적이지도 않다. 최초의 한국형 히어로 액션이라고 하지만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벌어지는 곳은 청계천(그러고 보니 일년 유지비가 한국형 블록버스터 한편과 비슷)의 협소한 공간과 세트장이다. 족자, 영화, 광고, CG로 이어지는 시각장 체제의 계보는 흥미로웠을 수도 있고 요괴들의 CG도 나쁘지 않으나 영화에는 <타짜>의 능수능란함이 없다.

부적에 대한 과잉 페티시화

같은 CG 중심 영화들인 <아바타>가 미국의 이라크 주둔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셜록 홈즈> 역시 근대적 산업사회로 접어든 런던에 잠복해 있는 반동적 세력에 대한 인지를 하고 있다면, <전우치>에선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이유에 대한 자의식을 보기 어렵다. 조선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자리매김했다고도 보기 어렵고, <아바타>와 <셜록 홈즈>가 그렇지 않은 판에 글로벌한 유행을 타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난감해 보인다.

전반적으로는 그리 인상적이지 않은 <셜록 홈즈>에 한 가지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다. 셜록 홈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내기 싸움을 하는 장면이다. 그 상대가 돌아선 홈스의 뒤통수에 침을 뱉자 그는 정확하게 자신이 연출한 다음 장면을 계산한다. 손수건을 던지고 턱뼈 이후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등. 영화에서 한번의 재연이 있은 뒤 실전에서 그것은 빠른 속도로 반복된다. 추리, 논리와 액션의 정확한 싱크를 보여주려는 장면이다. 반면 <전우치>에서 만능 해결사는 부적이다. 부적에 대한 과잉 페티시화가 영화 내내 이루어진다. 이 부적을 누가 만들었는지 어떻게 쓰는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 그래도 영화에서 부적은 만능 뱀약이다. 부적이 일으키는 효과는 CG로 재현된다.

미남 남성 스타에 대한 페티시화 그리고 부적의 과대 사용. 과잉으로 성적이며 심리적인 주술적 투자가 가리키고 있는 것, 증후화하고 있는 것은 한국사회의 비이성적 드라이브, 욕구, 욕망이다. 500년이 지나도 성장하지 못하는 피터팬 전우치와 관객의 공명이 박스오피스를 통해 일어날 때, 미래에 대한 근심은 요괴처럼 깨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부적으로 봉인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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