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앵스트(Angst)에 휘몰려 정처없이 달려가는 예술가가 있다. 아무것도 쓸 수 없으리라는 절망, 욕설을 끼얹건 광대 짓을 하건 일상을 부수어야 한다는 의무감, 적당히 겁 많고 약은 현대인을 향한 경멸로 부글댄다. 이 격렬한 예술가상은 낯설지 않다. 보들레르와 독일 표현주의, 비트족으로 면면히 흘러온 피가 <풀이 눕는다>에도 흐르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3년 전 소설로 등단했지만 이력은 그것으로 끝. 삶 자체가 틀려먹은 것 같아 마음이 쓰라린 순간, 풀을 만난다. 풀은 공고 출신 아마추어 미술가로 홍대 낡은 옥탑방에서 무작정 캔버스를 메우며 살고 있다. 그는 서울을, 거대한 빌딩 숲을, 돈을 탐하지 않는 순수한 청년이다. ‘나’는 풀과 합심해서 옥탑방 창고를 개조해서 공동 작업실을 만든다. 벽을 흰색과 오렌지색으로 칠하고 소닉 유스의 음악을 들으며 섹스를 하고 미래를 꿈꾼다. 처음에는 뭐든 잘될 것 같다. 풀이 일곱 번째 캔버스를 채우고 ‘내’가 오십 번째 시를 쓴 날, 그들은 작품을 갤러리와 출판사로 보내고 상수동 레게바에서 파티를 연다. 이쯤 되면 홍대 등지에서 예술가를 꿈꾸는 달뜬 청년들의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그러나 <풀이 눕는다>는 청년, 희망, 꿈 따위 어여쁜 이미지를 밀어낸다. 서울의 빈곤을 정면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누구나 안다. 서울은 ‘비싼 건 좋고 싼 건 후지고 돈은 쉽게 써버리는 좆같은’ 공간이라 가난한 자의 숨통을 조이는 곳이라는 걸. ‘나’는 빈티지 쇼핑몰을 하는 동생에게 빌붙어 살고, 풀은 무가지 배포와 베어링 공장 아르바이트로 연명하지만 돈은 늘 모자라고 생활은 부서져간다. 그들은 가난을 밀어낸 매끈한 제도 예술이 아니꼬워 문학 시상식장에서 술을 퍼마시며 들썩대고, 갤러리 전시회에서 악을 쓴다. 이런 즉자적 저항장면에서는 미국 소설가 찰스 부코스키가 떠오른다. 부코스키의 소설 속 분신 치나스키는 일부러 만취해서 대학에서 강연하다 토악질하는 시인이다.
사소한 체험도 강렬하게 감각해서 전달할 줄 아는 작가의 힘이 상승과 절정, 하강으로 이어지며 무난히 흐르는 줄거리에 압도적인 생기를 부여한다. 소설에서 언급한 소닉 유스, 산울림, 황병승, 다다와 초현실주의, 부코스키, 셀린, 보들레르… 이 리스트에 <풀이 눕는다>를 추가해도 좋겠다. 파리나 런던이 아닌, 서울이 무대인 예술가 소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