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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나는 당신을 봅니다
고경태 2010-01-01

‘혜자종니’라고 했다. 이렇게 쓰면 언론중재위원회로부터 “어린이들의 언어습관에 나쁜 영향을 준다”며 권고조치를 당할 지도 모른다. ‘해자정리’는 어떠한가. ‘혜자젖니’도 있다. MBC 일일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의 빅히트 유행어가 ‘빵꾸똥꾸’였다면, 그 전신이라 할 <거침없이 하이킥>이 재밌게 터뜨린 말 중 하나는 그 괴상한 사자성어였다. 윤호(정일우)는 데이트를 하던 전교 1등 소녀에게 “0000라고 하잖아, 괜찮지?”라는 말을 듣는다. 차인다는 뜻인 줄도 모르고 어리둥절하기만 했던 윤호는 밤새도록 인터넷 검색창에 그 발음을 귀에 들린 대로 입력한다. ‘혜자종니·해자정리·혜자젓니’일 리 만무한,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의미의 ‘회자정리’(會者定離)가 각별하게 음미된 2009년이었다.

한달 전 한국영상자료원으로부터 ‘도전! 나도 프로그래머’공모의 심사를 의뢰받았다. 12월 영상자료원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상영하는 고전영화 VOD 기획전을 관객이 직접 프로그래밍하는 이벤트였다. 공모를 통해 접수된 23편의 기획안을 읽으며 머릿속이 어지럽게 꼬였다. 상대적으로 괜찮아 보이는 내용은 몇편 보였으나, 딱 이거다 싶은 한편이 골라지지 않아서다. 그러다가 마지막 23편째를 읽으며 필이 왔다. 제목은 ‘2009년 한국영화 인 메모리엄’이었다. 아래는 다음과 같았다 “2009년. 불행히도 우리는 많은 영화 친구들을 다른 세상으로 보내야만 했다. 12월, 그들을 돌아보며 작별하기 좋은 달이다.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한국영화 VOD에서 2009년 인 메모리엄을 시작한다.” 그리고 여운계, 정승혜, 도금봉, 유현목의 이름과 상영작 리스트가 적혀 있었다. 다른 심사위원들도 생각이 비슷했나 보다. 결국 그 기획안은 대상작으로 선정되었다.

‘회자정리’로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다. 2009년을 꿰뚫는 키워드가 뭐냐고 묻는다면 ‘이별’이라고 말하고 싶다. 좋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충격적인 이별로, 양궁으로 치면 가슴에 10점 화살을 맞았던 한해였다. 이별은 ‘보지 못하는 고통’이다. 다시는 그 사람의 실물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슬픔.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에서 제이크 설리(샘 워딩턴)는 나비족 여전사 네이티리(조 살다나)와 사랑에 빠진 뒤 서로 이렇게 속삭인다. “나는 당신을 봅니다.” 그러면서 너무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그 한마디 대사에 관객들은 꽂힌다. 그저 보기만 한다고 말하는데도, 새삼스럽게 마음속에서 뭉클한 난방장치가 가동된다.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 어쩌면 2010년 새해 가장 큰 소망은 ‘당신을 계속 보는 것’이어도 좋겠다. 끔찍한 이별을 하지 않는 것!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고 말할 기회를 상실하지 않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