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치>만 손오공처럼 둔갑술을 부리는 게 아니다. 임수정도 <전우치>에서 구미호처럼 수차례 변신한다. 카메라가 과거와 현재를 어지럽게 횡단하지만, 전우치는 전우치고 초랭이는 그대로 초랭이다. 하지만 임수정은 보쌈당한 과부였다가 혼쭐나는 스타일리스트였다가 무법의 악당으로 변하는 다색다종 캐릭터를 연기했다. “사실 인터뷰를 하고 싶어서 제작사에 먼저 요청했어요.” 뒤늦게 안 사실. 변신을 더욱 갈망했던 건 <전우치>의 서인경이 아니라 임수정 자신이었다. “다른 배우들과 달리 먼저 아는 척을 잘 안 한다”는 사진기자의 귀띔은 아무 소용없었다. 새침한 구석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전우치처럼 부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임수정은 독심술이라도 지닌 양 묻기도 전에 답했다.

-쉽게 말 걸기 어려운 스타일이라고 들었다. 변한 건가. 뭘 물어보나 걱정도 했다. =많이 안 물어봐도 된다. 사는 이야기 하면 되지, 뭐. 나이 들면서 얼굴이 두꺼워졌나 보다. 사적인 자리에선 말이 없고 여전히 낯도 많이 가리는데 확실히 인터뷰 때만큼은 더 밝아진 것 같다. 이걸 노련해졌다고 해야 하나. 단번에 확 바뀐 건 아니고. 그동안 작품하면서 만났던 감독님과 배우들에게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을 거다. <전우치>는 게다가 입담 좋은 털털한 아저씨들이 많아서.

-원래 말할 때 손동작이 많나. 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놓고 말할 거라고 예상했다. =전보다 많아졌다. 말로 못하는 것을 손으로 다 하는 거지.

-전우치를 비롯해 다른 배역들과 달리 서인경은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변신 로봇 같던가. 시나리오를 받은 게 2008년 4월이었다. 감독님은 역할 비중 때문에 출연 제의를 하면서 좀 미안해하셨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젠 캐릭터들이 많이 나오는 영화를 해보자 싶었고. 몸을 좀 가볍게 하고 싶었다. 깊이보다는 너비가 더 중요했다. 짧지만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구나 하는 점도 있었고. 특히 후반부 스타일리스트나 팜므파탈 모습은 전에는 못 보여드렸던 것이니까.

-외려 한복 입은 과부 모습이 더 재밌던데. =감독님도 과거 모습이 더 좋다고 하셨다. 과부라고 하지만 은장도 들고 수절하는 과부가 아니다. 일찍 시집 와서 철도 들기 전에 남편이 죽은 과부니까. 철부지지. 입고 있는 한복도 아기들이 입는 꼬까옷 느낌이다. 족두리 얹고 조끼 입고. 아기 같은 모습이어서 그렇지 안 그랬으면 안 어울렸을지 모른다.

-같지만 다른, 여러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서 목소리톤이나 말투에 변화를 준 것 같던데. =과거의 철부지 과부는 일부러 사극 말투를 피했다. 조선시대 여자처럼 보이면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니까. 후시녹음을 많이 했는데 과거 부분에서는 목소리가 성우 더빙하는 것처럼 되더라. 현장에서는 조금 더 현실감있게 대사를 쳤는데. 감독님은 더빙 목소리를 더 좋아하셨다. 그러고보면 후시녹음 때 캐릭터를 좀더 분명히 잡아낸 것 같다. 현대로 와서는, 일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캐릭터인데. 혼이 나도 한귀로 흘리고. 한마디로 제멋대로 캐릭터인데 너무 착한 애처럼 보이면 안되겠다 싶었다. 팜므파탈의 경우는 대사가 거의 없으니까. 주로 눈빛으로 톡톡 쏘아야 했다. 대사는 여우처럼 좀더 가늘게 하려고 했고.

-영화 속 영화의 모습까지 합하면, 4가지 캐릭터로 변한다. 감독의 주문이 뭐였는지 궁금하다. =전형적인 캐릭터만 아니면 된다고 하셨다. 청순하고 착하고, 나쁘고 못됐고, 이렇게 확 나누지 않고. 이쪽에도 걸쳐 있고, 저쪽에도 걸쳐 있고. 다음을 예상할 수 없는 엇박의 캐릭터라고 해야 하나. 감독님은 내가 점점 이상한 여자가 될수록 좋아하셨다.

-최동훈 감독과 작업한 배우들에겐 꼭 물어보는 질문이다. 촬영 중에 감독이 직접 시연을 많이 하는 편인데 어땠나. =당혹스럽지, 처음엔. 본인은 내 연기를 보지 말고, 라고 운을 떼지만 배우 입장에선 아무래도 보게 된다. 이런 걸 원하는구나 알 수 있으니까. 재밌는 건 전우치든, 초랭이든, 서인경이든 다 감독님 같다는 거다.

-아무래도 당혹스러운 상황은 첫 촬영 때가 가장 컸을 텐데. =갈대밭에서 말로 변한 초랭이를 타고 가다 전우치가 갑자기 나타나는 장면부터 찍었다. 배우들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흔히 배우들은 한 테이크 뒤에 모니터 보고 이야기 나누고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어 한다. 그런데 최 감독님은 모니터하러 가려고 하면 먼저 뛰어오셔서 시연한다. 모니터를 보려야 볼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배우에게 맡기는, 그래서 스스로 뭔가를 만들도록 하는 환경을 더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처음엔 신경이 쓰였다. 이게 맞나, 아닌 것 같은데, 한 적도 있고. 만약 감정의 기복이 심한 영화였다면 현장에서 눈에 불이 나게 싸웠을 거다. 그게 재밌긴 한데. (웃음) <전우치>는 그런데 순간적으로 다양한 걸 보여줘야 하는 캐릭터였으니까 중반 이후엔 의견을 수용하게 되더라.

-최동훈 감독이 배우 마음을 알아차리고 시연 수위를 조절한 건 아닌가. =아니. 시종 일관된 모습이었다. <범죄의 재구성> 때 백윤식 선생님도 한두 마디 하셨다더라. “그럼 최 감독이 (배우) 하지.” 근데 감독님이 꼭 이것이어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건 아니다. “수정, 아, 이게 말이야. 인경이가 말이야.” 듣다보면 “네 감독님 알겠어요”, 하게 된다. 그분이 지닌 유머러스함 때문에 배우들이 기분 상하지 않고 따르게 된다.

-<전우치>에서 와이어 연기도 처음 해봤을 텐데.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잠깐 타긴 했는데, 그건 매달리기만 한 것이라서. 제대로 와이어 타고 논 건 처음이다.

-놀았다고 말하기엔 격한 장면이던데. 차 위를 밟고 다녀야 하니. =차 위를 점프하면서 날아다니는 장면은 위험해서 실제로는 뛰는 장면과 차가 망가지는 장면을 따로 찍었다. 촬영시간이 많이 걸려서 힘들기도 했고. 높은 힐의 부츠를 신고 있었는데 착지할 때 여러 번 휘청거려서 NG도 많이 났다.

-좀 신기하긴 했다. 이전까지 병약한 소녀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임수정이 차를 박살내다니. =그 장면은 서인경이 파워를 갖게 되면서 자아도취에 빠진 장면인데. 기분이 좋아져서 즐기기 바쁜 거지. 다른 배우들의 액션은 대결 구도로 이뤄져 있는데, 서인경은 액션장면에서도 자기 혼자 필에 젖어서 즐긴다.

-언제나 혼자였을 것 같다. 전우치와 초랭이와 화담과 신선들은 매번 무리지어 다니는데. =다른 배우들과 같이 호흡하는 영화에 목말라서 선택했는데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촬영기간이 길어서 나의 분량에 맞춰서 띄엄띄엄 가면 갑자기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었고. <전우치> 현장이 그렇다고 ‘우리 여배우님 오셨어요’ 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경상도 분들이 많아서 그런가. ‘어, 수정이 왔어’ 그리고 5분 뒤면 분위기 ‘쌩’ 했으니까. (웃음)

-결석이 많아서 진도를 못 따라가는 학생 같았겠다. =남의 촬영현장 놀러간 것 같은 기분이었지. 현장에 가면 군것질을 많이 하는 편인데, 그것도 지겨워지면 감독님하고 수다를 많이 떨었다. (강)동원씨랑은 한쪽에서 와이어 타느라 고생하고 있는데 딴이야기하고.

-극중 여배우로 나오는 염정아와는 그래도 좀 어울렸을 것 같다. =진짜 서인경과 만난 거지(<범죄의 재구성>에서 염정아의 극중 이름 또한 서인경이다). <장화, 홍련> 때도 나를 괴롭히는 역할이었는데. 그때는 영화 특성상 긴장감이 있어야 했고, 이번엔 선배님이 괴롭힐 수록 더욱 신나는 캐릭터라 더 좋았다. 게다가 결혼하고 아이 낳은 뒤에 생활이든 연기든 더 유연하고 풍부해지셨다. 그래서 현장에 오실 때면 스탭들이고 배우들이고 너무 신나했다.

-시사회 뒤 기자회견 때 김윤석은 자신은 키스가 처음이었다며, 좋았다고 했다. 임수정은 많이 해봤겠지만, 이라고 덧붙이면서. 그 뒤에 보니까 ‘나도 좋았다’고 답하던데. 진심인가. =옆에서 최동훈 감독님이 계속 “수정이도 뭔가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하셨다.

-현실에선 인생 선배니까 자신(김윤석)이 키스를 더 많이 해봤을 텐데. =맞다. 하하하. 시나리오를 봤을 때 키스장면을 본능이 깨어나는 대목이라고 봤다. 굉장히 섹시하게 보일 수도 있겠군 했는데 현장에서 좀 바뀌었다. 화담이 악의 화신처럼 묘사되고. 인경의 입에 손가락을 넣는 장면도 추가됐고. 화담을 무서워하고 짓눌려서 이용당하는 모양이 됐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당하는.

-비슷한 또래인 강동원과는 어땠나. =정말 영특한 배우다. 자기가 해야 할 것은 놓치지 않는다.

-그건 본인도 갖고 있는 건가 아니면 없는 능력인가. =좀더 갖춰야 할 능력이다.

-준비해서 나오는 것 같나 아님 순발력인가. =본능적인 것 같다. 이 순간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재빠르게 알아차린다. 난 눈치를 채고 나면 때를 놓친다. 좀더 여우가 돼야 하는데. 지금까진 너무 곰처럼 연기하지 않았나 싶다. 보라카이에서 마지막 장면을 찍고 나서 같이 쫑파티를 하는데 동원씨가 그러더라. 본인은 곰이 되고 싶은 여우인데, 누나는 여우가 되고 싶은 곰이라고. 맞다. 자극이 많이 됐고, 많이 배웠다. 지금까지는 상대배우와 호흡만 생각했지, 내 것을 찾는 데는 좀 소흘한 것 아니었나 싶다.

-거칠게 말하자면, 모두들 지금까지 임수정이라는 배우에 대해선 만족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임수정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열심히 임했지만 대중의 기억에 임수정이 없을 수도 있다. 돌아볼 여력 없이 지금까지 주어진 상황만 열심이었는데 어느 순간 회의가 들더라. 지금까지 해왔던 내 방식이 잘못된 것 아닌가. 앞으론 뭔가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 <전우치> 대사처럼 ‘이제 변해볼까’ 싶은 거지. 스포트라이트를 더 많이 받아야겠다는 욕심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 주장도 더 많이 피력해야 할 것 같고.

-그런 생각을 가장 많이 했을 때가 언제였나. =<행복> 끝나고 나서 휴식기를 좀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1, 2년 동안 슬럼프와 우울증이 겹쳤다. 생각이 많아지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 그 시기를 겪고 나니 좀 정리가 됐다. 자신에 대한 확신도 생겼고. 지금까지 잘못한 건 아니지만 앞으론 더 나 자신답게 살자. 욕 좀 먹어도 되고, 싫은 소리 들어도 되고, 그래도 하고 싶은 표현 다 하고. 착하지 않다는 말 들으면 어떤가. 남의 시선 대신 내 감정에 좀더 충실하자 싶었다.

-그전엔 의식을 많이 했나보다. =지나고 보니 의식하면서 살았구나 싶더라. 배우 임수정은 20대를 잘 보냈지만 개인 임수정은 엉망이었다. 행복하지 않았고, 나의 20대는 없었다. 그러면서 역으로 일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했던 것 같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임수정이라는 틀에 매여 있었던 거다.

-소속사에서 그런 말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나. =(웃음) 다들 알고 있다.

-알고는 있는데 <전우치>의 서인경처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것 아닐까. =나대로 살고 싶다고 맘먹은 게 중요한 거지. 싫음 싫다고 욕도 좀 하고 그러고 싶다. 여배우라는 타이틀이 한국사회에선 엄청난 제약이다. 그런데 그 이전에 나도 사람이다. 그렇게만 살기는 싫은 거지.

-<여배우들> 봤나. =안 그래도 다들 물어보신다. (웃음) 아직 못 봤다.

-<피아노 치는 대통령>으로 데뷔한 게 10년 전이다. 하지만 필모그래피를 보면 작품 선택에 지나치게 신중했던 것 같다. 덧붙여 아까 곰과 여우 이야기를 좀더 확장하면, 앞으로는 장르적인 색깔이 강한 영화를 택할 것 같은데. =캐릭터가 분명하거나 장르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영화에 대한 관심이 있다. 신중함이야 여전히 갖고 갈 거다. 캐릭터보다는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많이 보는 편인데, 눈에 안 차는데 욕심내고 싶진 않다. 다만 단편이어도 좋고 또 작은 역할이라고 해서 구애받진 않을 거다. 그러다보면 더 많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지.

-<푸켓>이라는 타이 단편영화에도 출연했다. =건너 건너 아는 제작자에게 연락이 와서 출연하게 됐다. 그전부터 내가 내 입으로 많이 뿌려놨다. 단편도 좋으니 해외 스탭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영화를 하고 싶다고. 잘한 것은 아니지만 첫 영어대사 영화였고, 좋은 경험이었다.

-고어 버빈스키나 유키사다 이사오나 외국 감독들이 관심을 표한 적이 여러 번 있다. 로비라도 한 건가. =기자들이 굳이 물어보니까 그런 거겠지. 느리지만 이름이 해외에 알려지는 게 중요하긴 하다. 다른 환경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기도 하고. 개인 임수정이야 익숙함이 좋은, 게으른 인간이지만 배우 임수정은 낯선 환경에 던져지는 게 더 좋다. 그래야 힘이 더 발휘되고, 적극적으로 변한다.

-전에 공효진이 어디선가 임수정이 게으르다고 했는데, 정말인가. =맞다. 피곤하다면서 집에서 잘 안 나온다고 했다. 그때 유재석씨의 답변이 ‘그런 분들이 있죠. 1년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피곤한 분들이’였다. 다행히 이젠 잠이 좀 줄었다. 전엔 12시간씩 자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게 못 자겠다. <전우치> 개봉하면 다음 작품 정할 때까지 운동도 다니고 그럴 계획이다. 스포츠 댄스도 배우고. 개인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학문도 있고.

-학문이라니. =비밀이다. 이쪽 계통이랑은 관련이 없다. 그냥 학문이라고만 하자. 아직 정해진 것도 없는데 ‘임수정, 학교 가다!’ 이렇게 기사 나면. (웃음) 오래전부터 관심이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깊이있게 공부하고 싶어 했더니 주변에서 대학원에 가라고 하더라. 근데 내가 학력이 고졸이잖나. 학부부터 다시 가야 하는데 큰일이지. 갈 길이 너무 멀어서.

-상 욕심도 있을 텐데. 신인상만 잔뜩 받았는데. =이제 받아야 할 때가 오지 않았나 하긴 한다. (웃음) 그러려면 작품을 잘 만나야 하는데 내년에 남자영화투성이다. 여배우들은 어떻게 살라고. 여배우들도 남자들처럼 뭉쳐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피 터지겠지만. 그리고 또 하나. (전)도연 선배님이 <하녀>로 돌아오신다. 하필 내가 욕심내는 시점에 오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