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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 품는 밤] 힘세고 탄력 넘치는 입심을 보라

<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 보고> 유용주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종잇값이 비싸고 인쇄술도 신통찮은 시절, 소설은 입에서 귀로 전해졌다. 시골 시장 약장수가 입담 좋게 떠드는, 도저히 안 듣고 지나갈 수 없는 이야기가 소설의 본령. 닉 혼비도 <런던스타일 책읽기>에서 문장 깔끔한 모던소설들을 읽다보면, 찰스 디킨스처럼 군더더기투성이라 해도 말발 하나는 죽여주는 소설이 그립다고 했다. 노동자 출신 시인으로 이름을 알린 유용주의 신작 <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 보고>라면 걸쭉한 입담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주리라.

<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 보고>의 주인공 김호식은 술에 취해 행인을 두들겨 패고 경찰서에 끌려가서도 난동을 부리는 이른바‘잡범 중의 잡범’이자 시인으로, 작가의 분신이다. 유치장 경장에게 김호식은 감옥에 들락날락할 수밖에 없었던 가난하고 힘겨웠던 과거를 털어놓는데, 그 개인사는 80년대라는 거대 역사와 만나 한 물결로 굽이쳐 흐른다.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힘들지만 일주일에 한번 시 창작 수업은 꼬박꼬박 가던 시절, 버려진 신용카드로 계산하다 덜미가 잡힌 그. 무전취식으로 유치장에 갔는데 민주화 투쟁으로 끌려온 대학생 무리를 마주친다. 또 81년 그가 입소한 부대는 하필이면 80년 광주항쟁에 투입된 군부대. 군 윗대가리에 대한 증오와 구타를 밥 먹듯이 일삼는 상사에 대한 미움을 삭여가며 문학공부를 낙으로 삼았는데, 병장이 되기 직전 상관 폭행 사건에 휘말려 육군 교도소 신세를 진다. 그 바람에 소값 파동으로 빚을 잔뜩 지고 술만 마시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작가는 도마 위에 내려놓아도 펄쩍 뛰는 물고기마냥 힘세고 탄력 넘치는 입심을 발휘하여 굴곡진 삶을 말한다. 단순한 입담을 넘어서, 상처와 죄책감에 짓눌리는 아픈 마음을 있는 대로 토해낸다. 그래서 이야기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지 않고, 순간순간 생각과 느낌에 따라 갈지자로 걷는다. 총각 딱지 뗀 경험이나 여인숙 여인을 찾아 질펀하게 관계를 가졌던 순간을 장황하게 묘사하기도 하고, 백이 없어 제대로 재판받지 못한 한스러움을 길게 토로하기도 한다. 또 검사, 군대 친구, 교도소 공장 책임자 등 그간 만난 인간 군상의 목소리도 가감없이 전한다. 이렇듯 삶 그 자체를 다듬지 않고 내놓은 예스러운 소설인데도, 이질감없이 썩 잘 읽힌다. 가난과 불의에 대한 울분이 한때의 감성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걸 요즘 들어 실감하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