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습니다
1990년대, 경제호황의 그늘 속에서 자폐적으로 내성 세계로 파고들던 세기말 소년이 관계에 눈을 돌리고 원망(怨望)이 아닌 원망(願望)의 열정을 품었다. 자기 세계 속에 갇혀 있던 이카리 신지가 무언가가,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있어서 무언가가’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초호기는 동물처럼 달리고 또 달린다. 에반게리온은 그렇게 신세기를 맞았다.
어쨌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破)>는 기존 관객이든 새로운 관객이든 누구나의 피를 뜨겁게 만들 애니메이션임에 분명하다. 다섯 차례에 걸쳐 일어나는 사도와의 대결 시퀀스는 현재 일본 아니메 기술의 첨단과 극적 쾌감의 최고도를 선사한다. 여기서 안도 히데아키는 서사를 요약하고 신비의 요소를 복병처럼 숨겨두는 숨은 보물 찾기 놀이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감성의 전개쪽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에반게리온: 파(破)>는 새롭다. 오랜 관객의 뇌리에 각인된 인식의 지점들을 꾹꾹 눌러줘가며 그노시스적 세계를 구축해가는 대신, 애니메이션의 쾌감에 주목하고 이미지의 즉물성에 충실하며 캐릭터의 상황에 절박함을 얹었다. 감독은 손쉬운 부정과 거부가 아닌 다른 차원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대를 배반해 지속가능한
공개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序)>(2007)는 비주얼을 강화하며 착실히 초반부의 서사를 정리했다. 소년과 소녀는 여전히 목숨을 걸고 에바에 오르고 적의 정체는 모호하다. 이어진 <에반게리온: 파(破)>는 악명 높은 구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보다 한보 더 나아간 파라노이악한 악몽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넘어서며 기존의 서사를 배반하고 나섰다. 파괴하지 않으면 새로운 생성이란 없는 양 말이다. 이 작품은 마니악한 분위기와 퀴퀴한 오타쿠 무드를 단번에 파괴하는 작품이다. 여전히 신비주의적 소재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영화의 서사는 신비주의의 세계에 골몰하지 않은 채 등장인물들의 절실함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데 집중한다.
<에반게리온> 시리즈는 TV판(1995)과 구극장판(1997)을 오가면서 끊임없이 관객의 기대를 배반했다. TV판의 결말에서는 주체할 수 없이 늘어놓은 서사의 구성요소를 미처 봉합하지도 못한 채, ‘알고 보니 모두 꿈’이라는 노장철학을 들고 나와 관객을 허무하게 만들었다.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장난어린 자조의 모습으로 보였다. 구극장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정적인 장면에서 끊임없이 신지의 과거 기억으로 회귀해 들어가서 진심으로 답답한 인상을 주었다. 부재의 기억, 단절의 고통, 소외의 경험이 미칠 듯 지루하게 반복되었다. 신비하고 숭고하며 잔혹한 세계와 폐쇄적인 개인의 기억이 삐걱거리며 맞물렸고 그 균열의 틈에 오타쿠 관객을 불러들여 이 소화불량의 결과가 마치 그들 탓이라는 양 변명을 돌리고 있었다.
관객을 불러들여 냉소적 게임의 파트너로 삼았던 감독의 기괴한 성벽은 이제 청산된 것으로 보인다. 달라진 신지의 절박한 표정을 보라. 캐릭터에 대한 진심어린 우애와 연민이 느껴진다. 신지는 이제 자신과 타인을 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새롭게 등장한 오피스걸 이미지의 당찬 인물 마리는, 편협한 자신감으로 가득 찬 아스카와는 차별되는 캐릭터로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그리고 쿠키 영상(엔딩타이틀 이후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궁극의 복병 카오루가 등장한다. 이제 앞으로 전개될 에반게리온의 서사는 기존의 TV판과 구극장판과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이야기다.
여기는 어떤 세계입니까
기억이 분명하다면 구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인간이 사라진 고적한 세계에 붉은 바닷물이 밀려들었다. <에반게리온: 서(序)>의 첫 장면이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하얀 포말이 백사장에 부서지고 붉은색의 파도가 밀려든다. 핏빛 바다 속에 도시의 잔해가 떠 있고, 서사는 다시금 TV판 1편의 장면으로 천연덕스럽게 넘어간다. 그렇다면 신극장판의 세계는 서드 임팩트 이후 신지의 삶/꿈이라는 것인가? 무궁동(無窮動, perpetuum mobile)처럼 감독은 <에반게리온>을 무한히 작동하는 반복의 체계로 만들고 있는 것일까?
<에반게리온: 서(序)>가 기존의 서사를 정리하면서 관객에게 상황과 인물에 대한 소개를 하는 편안한 도입부였다면, <에반게리온: 파(破)>는 기존의 서사를 파괴하고 배반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파격적 전개부다. 기존의 <에반게리온> 팬이라면 여러 번 반복해서 보았을 이 세계에 변화된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 새로운 시리즈의 온도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일상적 생활에 온기가 스며들었고, 전투신에서는 열기가 폭주한다.
기존의 작품에서는 네르프의 본부가 있는 지하 비밀기지 지오프런트, 신지가 다니는 학교, 신지와 아스카와 카츠라기 대위가 함께 거주하는 아파트 이외의 공간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학생과 피난민이 아닌 사람들 역시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에바와 사도의 격투가 벌어지는 도시는 늘 텅 빈 부재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신도쿄시를 유토피아적 병풍 같은 배경으로 삼은 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경이 서정적으로 곳곳에 등장한다. 출근을 하고 등교를 하는 사람들의 얼굴들. 그리고 에바와 사도의 격투가 벌어졌을 때 단지 무표정한 ‘군중’덩어리가 아닌 고통과 경악의 ‘표정’을 품은 실제의 사람들. 이러한 온기의 변화는 등장인물들의 언어에서도 드러난다.
정직한 ‘부정’은 나쁜 ‘긍정’보다 낫다
<에반게리온: 서(序)>의 후반부에서 ‘사요나라’라는 레이의 인사는 신지의 감성을 울렸다. 신지는 레이에게 안녕(사요나라)이라는 슬픈 말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해하는 레이에게 그는 그냥 웃어줄 것을 요구했다. <에반게리온: 파(破)>에 등장하는 뜬금없는 서사, 즉 레이와 아스카가 경쟁적으로 신지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려는 시도는 변화된 감성을 드러낸다. 음식이란 ‘함께 먹는 것’이다. 함께 먹기에 즐거운 것이다. 그래서 신지가 싸준 도시락을 받고 레이는 난생처음으로 ‘고맙다’(아리가토)라고 말한다. 함께하는 관계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작 TV시리즈의 주제가인 <잔혹한 천사의 테제>가 신극장판에서는 <뷰티풀 월드>로 바뀐 것에 주목해보자. 전작의 주제곡은 (외부의 목소리가 강요하듯) 소년에게 신화가 되라고 주장하는 ‘잔혹한 테제’가 주제였다면, 새로운 주제곡은 (여전한 외부의, 그러나 따뜻한 목소리가 위로하듯) ‘내 세계가 사라지기 전에 소원을 들어준다면’이라는 가정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서 신지는 절박한 심정으로 레이를 구하기 위해 에바에 오른다. 그리고 카오루는 약속된 시간이 되었다며, 이번에야말로 너만은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의미심장한 등장의 메시지를 알렸다. 이들은 이제 ‘누군가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무엇이 되려는 열정과 소망을 품는다. 그래서 나는 이 ‘뷰티풀 월드’라는 표현이 아이러니의 수사가 아니라고 믿는다.
비판을 촉발하는 정직한 ‘부정’은 손쉬운 화해를 가장하는 나쁜 ‘긍정’보다 낫다. 하지만 그보다 나은 것은 생성의 기초가 되는 절박한 긍정이다. 그렇기에 신극장판에서의 안도 히데아키는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으로 보인다. 생성은 철저한 기성 세계의 ‘파괴’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번 시리즈에서 마리와 신지가 보여주었듯이 ‘동물적’ 수준으로 철저하게 자기 파괴를 겪은 자들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이제 그는 어떠한 세계를 상상하고 있을까. 기존 시리즈 서사의 대부분이 이미 이번 회에 등장했으니 그의 ‘세계놀이’가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될지, <에반게리온: 큐> 이후의 세계는 어떠할지는 완전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았다. 작은 관계성(너와 나)의 문제가 구체적 연관없이 ‘세계의 위기’나 ‘종말’ 등 추상적 문제에 직결하는 작품군인 ‘세카이계’의 부정성이 승화되는 지점으로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시큼한 신비주의의 냄새를 유포하며 숭고한 가짜 이미지의 세계에 투항할 것인가. 나는 전자에 예감을 걸었다. 신세기 10년 동안 겪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매너리즘이 도통 재미없고 지루한 까닭에, 감독의 아직은 낯선 ‘열혈’ 감성이 복고적 감성이 아닌 현실의 권태로움을 뚫는 생성의 기반이 될 것이라는 데 기대를 걸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