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병 후유증으로 씨네리 필자 송년모임에 못 갔다. 톱필자에서 종신필자로 신분도 바뀌었는데 말이다. 지난봄 여차저차 ‘지금 안 자르면 평생 못 자른다’ 했는데, (아마도 별 관심없는) 편집장과 편집팀장이 니 맘대로 하라고 했다. 사람 만나는 걸 직업으로 십수년 산 덕에 비교적 여러 분야를 접했는데 대체로 영화감독군이 제일 똑똑한 것 같다. 뭐랄까, 자존감과 긴장감이 절묘하게 섞인 인종들이랄까? 그들을 능가하는 귀신같은 이들이 있으니 제작자들이다. 판을 깔아주(고 감독들을 다루)니깐. 그럼 제작자들이 무서워하는 건? 관객이지. 여차하면 판을 접어버리거든. 이런 똑똑하고 귀신같고 무서운 분들이 보는 매체에 한주도 안 빼먹고 칼럼을 쓴 게 올해 내가 한 일 중 제일 잘한 일이다. “사람은 자기가 읽은 책”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사람은 그가 구독하는 매체”라 말하고 싶다. 정보의 양보다 질과 소통의 방식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한해를 보냈기 때문이다.
초록마을 10주년 기념 책자를 보았다. 참 ‘므훗’한 숫자다. 그런데 대표이사의 감사의 말에 얹히는 대목이 있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친환경 전문 기업으로 힘차게 도약할….” 뭔가 이상한데? 환경 친화적이고 안전한 먹을거리는 로컬푸드 아니야? 꼭 글로벌 기업 해야 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삼겹살 구워먹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성장·경쟁·성공 신드롬이 혹시 초록마을까지 침투한 게 아닌가 순간 아연실색했다. 가령 <씨네21>이 글로벌 매체가 된다고 생각해보라. 외국 배우와 감독들을 (그들은 모르게) 야릴 수 있나? 저예산, 마니아 영화들을 조명할 수 있나? 무엇보다…, 읽을 수가 없잖아. 영어로 쓰여지면.
여하튼 우리는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시대를 건너가고 있다. 스펙을 쌓고 경력을 관리하는 데 일상을 반납한다. 하지만 그것이 일과 행복, 무엇보다 생존(!)과 꼭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게 인생의 비밀. 혹시 올해 미룬 일이 있으면 새해에는 꼭 하시길 바란다. 사람은 ‘한 일’과 ‘안 한 일’ 중 ‘안 한 일’을 더 후회하게 마련이다. ‘한 일’에 대해서는 심리적 면역체계가 훨씬 잘 작동하기 때문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