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란 단어는 더이상 함부로 발음되지 못한다. 종종 실패했고, 너무 많은 피를 빨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고양이의 이중생활>은 그럼에도 지금 시대 혁명가는 존재하는지, 혹은 다시 한번 혁명의 시대가 오는 것이 가능한지 묻는 소설이다. 그렇다고 근엄하거나 사상적인 텍스트로 대부분을 채우는 그런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소시민적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어렵게만 생각되던 혁명과 혁명가, 그리고 혁명이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소설이다.
한 시절 유럽을 배회하던 혁명의 유령은 <고양이의 이중생활>에서 PtRe(Proletariat Revolution)라는 한국의 한 인터넷 카페에 내려앉는다. 니힐리스트, 헤르메스, 몽상가 등의 아이디로 활동하는 이 카페의 멤버들은 트로츠키와 <공산당 선언>, 스탈린과 관료주의로 게시판을 도배한다. 역사 너머로 사라진 사상을 추억하는 낭만주의자, 혹은 평등이란 유토피아적 이론에 매료된 지성인 집단쯤으로 이들을 추측할 때쯤 충격의 정기모임이 열린다. 부유한 집안에 기생해 살아가는 대학생, 백수가 된 30대 청년, 속물 근성의 명문대 여대생, 가족 부양에 여념이 없는 40대 가장이 주요 멤버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게다가 이 모임의 주최자는 당돌한 일곱살 천재소녀다. 웹상에서의 달변은 온데간데없고, 초라하고 비루하고 약간은 우습기도 한 보통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소설은 웹과 현실을 오가는 멤버들의 이중생활, 겉으로는 혁명을 외치면서 사실은 아주 개인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고발한다. 카페에 집착하고 혁명에 집착할수록 이중생활의 틈은 점점 더 벌어진다. 급기야 사회주의 혁명 90주년을 맞아 멤버들이 행사를 치르기로 한 2007년 11월7일, 어떤 사건이 터지고 멤버들의 극단적인 두 가지 삶 중 하나는 종말을 고한다. 물론 예상했듯 남는 쪽은 비루한 현실이고, 유토피아였던 혁명은 사라진다.
<고양이의 이중생활>은 가볍고 부담스럽지 않은 필치로 위장한 채 혁명의 허상을 냉철한 시선으로 조명할 줄 안다. 여기엔 평소 소설 쓰기와 함께 러시아 문학 강의 및 연구를 병행하는 작가의 이력도 이바지하는 듯하다. 작가 스스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과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의 몇 가지 모티브를 활용했다고 밝혔고, 그 말대로 혁명의 공허함을 담담하게, 혹은 시니컬하게 지적하는 몇몇 대목에서 그들 작품의 그림자가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