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사과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깟 자존심 때문에, 용기가 없어서, 혹은 죄책감이 없어서. <사과는 잘해요>의 두 백치 주인공, ‘나’와 시봉은 이에 착안해서 빈틈시장을 개척한다. 차마 얼굴 보고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사과하는 것이다. 말로 하는 사과 누가 받나. 그들은 쇠파이프로 손목을 휘갈기거나 열중쉬어 자세로 엎드려뻗쳐를 한다. 사과받을 이가 속시원해지도록 징글징글하게 제 몸뚱이를 괴롭힐 작정인 셈.
‘나’와 시봉이 사과를 빙자한 자해공갈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복지원 출신인데, 복지사들은 “네 죄가 뭔지 아느냐”며 그들이 죄를 고할 때까지 구타하곤 했다. 카프카의 소설마냥 뜬금없이 ‘유죄’를 선고받고, 없는 죄도 지어내야 했던 것. 심지어 복지원에 원생이 늘어나자 ‘나’와 시봉은 원생들을 대신해서 죄를 고하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는다. 인류를 대신해서 피 흘린 예수처럼 대속하는 것이다. 엉겁결에 복지원을 나온 이들은 할 줄 아는 게 사과밖에 없어 사과로 밥벌이를 한다.
그러나 타인의 죄를 찾아내 집요하게 사과한다 한들 진심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 바람나서 절름발이 아이와 아내를 버린 사내가 10년 만에 사과를 전하려고 ‘나’와 시봉을 찾는다. 정작 아내는 남편을 이미 잊었다며 사과를 거부한다. 어머니에게 늘 미안해하는 절름발이 아이를 보면, 그녀의 상처가 단순한 사과로 풀릴 수 없을 만큼 깊고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나’와 시봉은 막무가내로 사과를 하려 들고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나아가 가해자가 애초에 사과할 마음이 없다면 그 어떤 시도도 무의미하다. 복지사들은 ‘나’와 시봉을 괴롭힌 일을 끝까지 후회하지 않는다. 복지원 원장은 반성은커녕 “죄는 모른 척해야 잊혀지는 법”이라고 말한다. 가해자들이 이러하니 ‘나’와 시봉을 억누른 폭력의 근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의 독백에는 시종일관 무기력함이 묻어난다.
<사과는 잘해요>는 자발적 반성과 진심어린 사과가 없는 살풍경한 세상을 백치들의 눈을 통해 ‘낯설게’ 보여주는 철학 우화다. 이기호 작가 특유의 생생한 변두리 이미지는 이 철학 우화를 현실에 단단히 묶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깔끔하고 리듬감있는 문체 덕에 빠르게 읽히지만 뒷맛이 깊어 한번 더 읽으면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