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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비극의 땅에서 돌아보다

누군가 희생해도 나아지지 않는 세상의 이름 <파주>

그간 <파주>에 관한 많은 평이 쏟아져 나왔다. 호의적인 평가가 주류를 이뤘지만 <파주>의 영화적 실패를 지적한 글도 있었다. 지금까지 나온 비평을 보면서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어졌다. 찬반 어느 쪽 입장에 있든 <파주>에 관한 글은 대부분 형부와 처제의 사랑 이야기라는 걸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인다. 틀린 말은 아니다. <파주>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큰 줄기가 둘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정작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 가운데 형부와 처제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감동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다(정한석이 정확히 지적한 대로 <파주>에는 관객이 밀도있는 감정을 공유할 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낚였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형부와 처제의 육체적 도발이 나오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난 너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라는 중식(이선균)의 대사가 나올 때 관객은 당황스럽다. 이전까지 중식이 은모(서우)를 이성으로 사랑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면 비판을 피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파주>를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경우에도 같은 딜레마에 빠진다.

넘치는 감정을 생략과 압축을 통해 사후적으로 증폭시키는 것도 아니다. <파주>는 그런 멜로드라마의 관습에 하등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파주>는 대체 어떤 영화인가? <파주>를 보고 영화적 감흥을 느낀다면 그건 어디에 기인하는 것인가?

러브 스토리의 강박을 벗고 보면 <파주>는 우선 중식의 이야기다. 중식은 8년 전 사건 이후 자신을 파주로 유배시킨다. 스스로에게 저주를 걸어 대학도, 목회자의 길도 포기하고 공부방 선생을 하는 것조차 과분하다고 여긴다. 행복은 그가 디딘 대지에선 자라지 않는다. 은모 언니의 몸에 새겨진 화상의 흔적(하필!)은 중식이 불운을 타고난 사람임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는 불행할 때 혹은 자신을 학대할 때 비로소 안심하는 사람일 것이다. “갚아야 할 것이 많다”고 여겨 계속한 철거반대투쟁만 봐도 그렇다. 중식은 영웅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에게 철거반대투쟁은 스스로 자신에게 내린 형벌이며 파주는 고행을 통한 종교적 마조히즘이 실현되는 장소이다.

<파주>의 또 다른 얼굴, 은모

“나는 너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중식은 그렇게 말한다. 그런 다음 키스를 하던 은모가 뛰쳐나갔을 때 은모의 바지춤은 풀어헤쳐져 있다. 한순간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힌 중식이 실수를 저지른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중식은 그동안 은모를 정신적 사랑의 대상일 뿐 아니라 성적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해온 것일까? 어느 쪽이든 중식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그는 어떻게든 은모를 보호해야 한다고 믿었다. 은모가 언니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중식의 사랑(혹은 사랑이라는 착각?) 역시 중식의 죄의식이 빚어낸 결과이다. 그는 지난 8년 자신을 억눌렀던 심리적 외상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안다. 그래서 은모가 자기처럼 될까 걱정하고 진실을 감추는 것이 그녀를 보호하는 길이라 믿는다. 세상엔 그런 형태의 사랑이 존재한다. 우리는 흔히 부모의 행동에서 이런 사랑의 예를 본다.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간섭하고 나무라고 타이르지만 무엇보다 진실을 감추면서까지 보호하려 한다. 중식의 표현을 빌리면 은모를 처음 봤을 때 그 아이는 그냥 중학생 꼬마였다. 중식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부모 같은 존재라고 여긴다. 중식은 그에게 형부의 자리가 허락된 다음에야 비로소 은모를 이성으로 대한다. 부모에서 형부로, 형부에서 연인으로 이어지는 연쇄는 하지만 성취되지 않는다(은모가 중식을 이성으로 사랑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은모에게 중식은 언니가 있는 동안엔 언니를 뺏은 남자였고 언니가 죽은 다음엔 언니를 대신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은모가 사랑이란 감정에서 아직 유아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은모는 중식의 애인이라는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중식은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 즉 보호자의 자리를 고수한다. “진실을 알고 싶다”는 은모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는 것으로, 은모의 실수를 대신해 감옥에 가는 것으로 중식의 자기 학대 욕망은 실현된다.

<파주>가 슬픈 감정을 불러온다면 그건 형부와 처제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사랑을 가로막는 규범이나 질서에 희생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만의 천국을 꿈꾸다 좌절하는 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느닷없다고 느껴질 만큼 그들의 사랑은 희미하게만 묘사된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사랑이 실현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죄의식의 전이를 막으려는 한 남자의 몸부림 때문이다. 마치 철거 중인 건물에 홀로 서서 저 거대한 포클레인에 맞서는 것처럼 안간힘을 쓰는데 중식의 삶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누려도 될 권리를 포기하고 행여 행복이 다가올까 자기 스스로를 학대하는데도 그에겐 안식이 주어지지 않는다. 투쟁이든, 사랑이든 중식에겐 “무슨 일인지 계속 생겨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선배의 아이가 펄펄 끓는 물에 데였을 때, 은모 언니의 몸에서 화상자국을 발견했을 때, 재로 변한 은모 언니를 발견했을 때, 은모와 단둘이 살던 즐거운 한때가 선배의 방문과 경찰의 침입으로 깨져버렸을 때 그는 운명의 희생양이 되고 강박에 갇힌 수인이 되고 만다. 중식에게 현실 세계가 마련한 공간도 결국 외로운 감방 한구석일 뿐이다. 그것도 보험금을 가로채려 했다는 엉뚱한 죄목이 마련한 자리. 죄의식의 발로라는 맥락만 제거하고 보면 현대의 성자라 불러도 좋을 중식에겐 영광과 명예는커녕 파렴치한 죄인이라는 딱지가 전부이다. <파주>는 그의 악운과 고단함, 그리고 세속의 인간이라 겪는 욕망과 좌절이 처제와의 금지된 사랑에 앞서는 이야기이다.

은모는 <파주>의 또 다른 얼굴이다. 8년 전 사고를 자신의 잘못으로 인식하는 중식과 달리 은모는 자신의 행동을 선악의 틀에 끼워넣지 않는 아이다. 어린 시절 은모는 그저 자기 것을 뺏기고 싶지 않은 아이였다. 은모는 중식에게 언니를 뺏길까 두려워한다. 은모의 학생 시절은 흔히 유아기에 보이는 행동들로 이뤄져 있다. 결혼사진에서 중식의 얼굴을 오리는 것으로 뺏긴 언니를 되찾고픈 욕망을 실현시키는 모습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 세상이 없어진다고 믿는 아이의 생각이나 다를 바 없다. 아무 대책 없이 돈 벌어오겠다고 가출을 해버리고, 자신을 돌보던 사람에게 한마디 말 없이 훌쩍 인도로 떠나버릴 때도 은모는 어린아이였다(“혼자 못 살아간다는 게 두려워서요”). 그리고 3년 만에 돌아온 파주. 철거 중인 마을의 살풍경과 네온 불빛의 나이트클럽 사이에 은모의 자리가 있다. 철거반대투쟁에 함께 하지만 그녀가 개발이나 철거에 관해 어떤 신념을 가진 것 같지는 않다. 고속촬영으로 우아하게 연출된 두 장면이 있다. 은모가 공중전화에서 사이렌 소리를 듣고 옛 기억을 떠올리는 대목과 한창 목숨을 건 철거투쟁의 한복판을 걸어가는 장면. 두 장면은 은모가 자기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의미를 잘 모르기에 특별해진다. 만약 은모가 사태의 전말을 아는 아이라면, 철거투쟁의 심각함을 아는 아이라면 의미없을 고속촬영이지만 두 장면은 혼란의 아우성 속에 어찌할 바 모르는 소녀를 부각시키는 느낌 때문에 숭고해진다. 중식의 말대로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이 위험천만한 도시에서 헤매는 것이다.

낙관적인 영화가 아닌 까닭

<파주>에서 은모가 헤쳐가야 할 세상은 알면 다칠 과거와 감당하기 힘든 현재로 이뤄져 있다. 이제 성년이 된 은모는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만 과연 그녀는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집을 팔라는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대목을 보면 그럴 것도 같지만 은모는 아직 나이트클럽 가는 재미를 잊지 못하는 젊은이기도 하다. 3년 전 중식이 무슨 일을 하다 잡혀갔는지 알지 못했고 지금도 왜 이런 일을 하는지 모른다. 철거반대투쟁의 한복판에서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용역깡패의 잔인함이 아니라 용역깡패를 조종하는 저 멋진 승용차의 중년 남자이다. 눈짓 한번으로 웨이터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권력자. 은모는 나이트클럽 사장을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몇몇 평자들이 희망의 증거를 찾으려 애쓰는 영화의 엔딩에서 나는 희망을 찾지 못하겠다. 나이트클럽 사장은 영화의 맥락에서 그저 악당일 뿐이고 그에게 끌리는 은모한테 이제 보호자는 없다(중식과 둘이 살던 한때엔 이왕이면 아가씨가 타주는 커피가 좋겠다는 아저씨들을 중식이 지켜보고 있었다). 영화는 불길한 암시를 주며 우리는 이미 은모가 나쁜 선택을 했다는 걸 안다. <파주>는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 낙관적인 영화가 아니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박찬옥 감독은 한 젊은이가 어떻게 기성세대의 삶을 동경하고 순응하게 되는지를 보여줬다. <파주>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 애쓰던 젊은이가 불행해지는 이야기다. 나쁜 운명과 잘못된 강박, 실수와 오해가 뒤엉켜 아물었던 상처는 덧나고 실패는 되풀이된다. 그런데도 좌절하지 않고 한 마리 양을 구하려는 어리석은 노력은 계속된다. <파주>는 누군가 희생해도 나아지지 않는 세상의 이름이다. 안개와 미스터리와 플래시백의 그곳은 원인과 결과를 구분할 수 없는 비극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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