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의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의 존재를 알게 될 때 특히 그렇다. 이를테면 히치콕의 영화 <39계단>의 원작 소설을 쓴 존 버컨 같은 사람. 그는 문학과 법학에 정통하고, 역사학자이자 군인이었으며, 정치계에 입문해 캐나다 총독 자리까지 올랐다. 그런 르네상스적 천재를 마주하고 나면 실수나 하지 않을까 마음 졸이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본인의 삶이 너무도 하찮게 느껴진다. 요절한 천재에 대한 아쉬움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 가능할 듯하다. 더 오래 살았더라면 누구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남는 것이다. 그들이 미래를 거세당한 대신 무수한 가능성으로 점철된 가상의 미래를 남은 이들에게 안겨주고 떠났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요절한 천재 아티스트 차학경이 지금까지 활동을 계속했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비디오아트, 영화, 문학, 퍼포먼스 등에서 남다른 재능을 선보였던 그녀가, 1982년 맨해튼의 한 빌딩에서 31살의 나이로 잔인하게 피살되지 않았을 경우를 생각해본다. 어느 페스티벌의 심사위원으로 선정되었을 수도,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제2의 백남준’으로 불리며 국제 미술계의 뜨거운 러브콜을 받거나 대표작 <딕테>가 그랬듯 비교문학과 여성학의 모범이 되는 소설을 집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 무엇도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도. 누가 알겠는가.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남겨진 작품을 보며 텅 빈 미래를 상상하는 것뿐이다.
차학경을 좋아했거나, 차학경을 알고 싶은 이들은 11월20일부터 27일까지 열리는 오프앤피스영화제에 주목하자. 비상업 영화제를 표방하며 올해 첫 발걸음을 내디딘 이 영화제에서는 특별전의 첫 번째 주인공으로 차학경을 선택했다. 그녀를 대표하는 설치작품인 <망명자>(Exilee)와 <통로/풍경>(Passages Paysages), 그리고 다섯편의 단편영화가 상영될 예정이다. 툭툭 끊어지는 영어 단어(<망명자>)의 병렬과 흐릿한 화면에 담긴 유년 시절의 모습(<통로/풍경>)에 미국 이주여성으로서 느꼈던 혼란과 상실감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