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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MB의 궤변처럼 들리네

악몽의 판타지 <굿모닝 프레지던트>

<굿모닝 프레지던트>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는 “MB가 반드시 봐야 할 영화”(김종철)나 “슬픔은, 지금 이런 대통령을 보지 못한다는 거”(이용철)에서 보듯이, 영화의 선의와 현실정치에 대한 반면교사적 측면이 강조되며 이루어진다. 감독도 “꿈의 대통령을 그린 것”(<매일경제신문> 인터뷰)이라 밝힘으로써, 영화가 바람직한 대통령상을 제시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영화의 가치를 담보하는 ‘이상적 대통령상’이 어떠한지를 검토하는 작업은 필요 불가결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견 참신한 세대교체와 여성주의를 표방하며, 현실의 대통령(MB)에 반(反)하는 지점을 가리키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지만, 영화가 표방하는 ‘꿈의 대통령’은 반민주적 엘리트과두제와 반여성주의, 그리고 MB가 대통령인 현실정치의 암흑지점을 그대로 공유한다. 백일몽이 아니라 악몽의 판타지인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과 인맥의 정치

영화는 국회 파행의 뉴스 화면으로 시작한다. “한심한 사람들”이라 일갈하는 말년의 대통령(이순재)은 정권 재창출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일년치 국회가 할 일 전부”에 해당되는 여야영수회담 안건을 ‘개인적 친분과 권위를 바탕으로’ 해결한 그는 오히려 야당 후보의 대선 승리를 내심 응원하는 눈치다. (대통령 피선거권이 40살 이상에 한정되므로) 4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차지욱(장동건)은 “빨라도 너무 빠른”(한채영에 대한 장영남의 논평) 코스를 밟은 정치 엘리트다. 서울대와 뉴욕대를 나온 정치학 석사로, 국민적 신망이 두터웠던 민주투사 정치인의 아들이자, 전직 대통령을 “아저씨”라 부르며 그의 딸과 연모하는 사이다. 정겨운가? 이는 노년 대통령의 소탈한 모습이나 참신한 정치 신인의 등장을 알리는 풍경이 아니라, 한국의 대통령제의 맹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광경이다.

김정호는 견제와 균형을 중시하는 삼권분립의 대통령이 아니다. 그는 의회를 경멸하며 정당의 자생력을 침식하고, 사면권을 최대한 활용하여 사법 권력을 무화하는 ‘제왕적 대통령’이다. 이로써 국가의 최고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구조적 포퓔리슴’(최장집 참고)이 발생하고, 나아가 대통령이라는 헌법기관이 인물로 체현되면서 개인화되는 ‘개인적 대통령’(Personal president)의 문제가 빚어진다. 여기에 민주화 운동세대 가족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인맥의 정치와 학벌(“당신이랑 나랑 대학 동기야!” “지욱아, 우리 정치는 쇼라고 배웠다”), 그리고 외모주의(“하긴 예쁜 사람의 말이 잘 들리긴 하지”)가 교직되는 지점에 “한국의 케네디” 차지욱이 존재한다. 물론 그는 국가 안보의 위기 상황에서 “선조치 후승인”을 결행할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치며, 신장을 기증하여 단박에 지지율 10%를 끌어올릴 정도로 개인적 매력이 출중하다. 비록 기증이 포퓔리슴적 전술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해도, 진짜로 결행한 건 감동적이며, 결단의 바탕이 된 아버지의 말씀은 루소의 ‘시민종교’를 연상시키는 숭고함이 있다.

문제는 (그가 떠올린 소년 시절의 말 “우리집엔 옆집이 없잖아”처럼) 그의 결정이 수평적 논의와 협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독야청청한 단독자의 내면적 교의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결정에 영향을 끼친 유일한 대화자는 요리사이며, 그는 영화의 실질적인 내레이터이다. 훈훈한가? 그런데 정권이 수차례 바뀌어도 변함없이 대통령을 지근에서 모시는 요리사와 경호팀이 (‘먹고사니즘’을 관장하는) 경제관료 혹은 (안전을 책임지는) 테크노크라트의 환유라면 어떻게 느껴지는가? 취약한 정당체제와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탕으로 인맥과 학맥에 의해 부상한 정치 엘리트와 그를 보필하는 선출되지 않은 관료권력이 지배하는 ‘과두제 대한민국’의 근미래는 악몽이다. 선거에 의한 두번의 정권교체에서도 정책과 노선의 변화가 감지되지 않으며, 오직 대통령 인물에 대한 취사만이 가능한 세계에서 사회적 적대는 드러나지 못하고 정치는 소멸된다.

여성대통령이 나와도 성차의 질서는 그대로

박근혜 이후 여성대통령 자체는 신선한 상상이 아니며, 이를 둘러싼 성차적 관계가 더 관건이다. 즉 여성이 유리천장을 부수고 남성의 자리에 앉는다 해도, 그로부터 새로운 성차적 관계가 창출되지 못한다면 의미는 축소된다. 영화는 여성대통령을 상상하면서도 성차적 관계는 혁신하지 못한다. 대통령과 영부인 역할로 나뉜 기존의 성차적 질서를 그대로 둔 채, 영부인의 역할에 남성을 끼워넣음으로써 발생되는 우스꽝스러움을 전하는 영화적 상상력은 유치할 뿐 아니라 반(反)여성적이다. 한경자(고두심) 부부는 어느 날 갑자기 ‘대통령-영부군’ 역할에 끼워진 게 아니다. 부인이 대법관, 법무부 장관, 대선 후보를 거쳐 대통령이 되기까지 내내 ‘집사람-바깥양반’의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이따금 친구들로 하여금 “경자야 술상 차려와”를 외치게 하는 남편이라니, 이는 현실보다 더 퇴행적이다.

대통령의 남편을 그녀의 정치적 동지나 참모로 설정하진 않더라도, 본래 전업주부도 아니었던 그를 굳이 ‘주부의 날’ 행사에 끼워넣을 이유가 있을까? 여성통치자와 남자의 관계에 대한 전복적 상상은 오히려 TV 사극에 있다. <선덕여왕>의 미실과 덕만에서 보듯이, 여성대통령의 남편을 가부장적 남성의 습속을 지닌 채 전통적인 여성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곤경에 빠진 인물로 그리는 건 갑갑한 상상이다. 기존의 성차적 질서를 그대로 둔 채 남자의 자리에 여자를, 여자의 자리에 남자를 넣는 것은 여성주의가 아니다.

누가 당신의 이웃인가?

세 에피소드 중 마지막 것은 (고스톱을 치던 요리사가 멸치를 다듬듯) 앞의 두개와 포개지지 않는다. 앞의 두개에서 비자금과 당첨금, 국가 안보와 신장 기증은 이익과 생명을 환유하는 공적·사적 알레고리 관계이며, 사적 매듭이 풀림으로써 공적 매듭도 해결된다. 그러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부동산 특별법과 이혼은 유비로 보기도 어렵고, 이혼이 막아짐으로써 법안이 통과되지도 않는다(이틀 남은 시한을 넘기면 10년이 그냥 지나간다는 대사로 보아 실패한 듯하다). 부동산 특별법의 발목을 잡은 남편의 토지 매입 스캔들이 이혼 위기로 비화되자 국민의 동정적 역풍이 일고, 대통령도 개인의 행복을 포기하기 싫어서 이혼 결심을 철회하는데, 여기서 부동산 특별법과 이혼은 어떤 상관성을 지니는가? 2년 전 종부세 논란 당시, “종부세를 못 내겠으면 강남의 집을 팔고 싼 동네로 이사 가라”는 대통령과 부총리의 발언에 “강남 거주는 투기가 아니라 교육 목적이며, 강남은 내가 아는 사람이 전부 사는 고향 같은 곳이다”라는 반발을 기억하는가? 혹은 현재 국내 정치의 가장 뜨거운 현안인 세종시 논란에서 ‘인구 분산의 효과는 없으며 공무원 가족의 주말 부부화만을 야기할 뿐’이라는 반론은 어떠한가? 가족의 행복이 중요하며, 지금까지 내 삶에 익숙한 것들과 결별(이혼)할 수 없다는 생각, 특히 자녀 교육과 “노후에 전원생활을 하고 싶었을 뿐”(임하룡의 대사)이라는 말이 타당하고 보편적인 욕망으로 추인되는 바로 그 지점에 ‘부동산 불패’의 신화가 있다.

영화는 대통령 개인의 행복을 포기할 순 없다는 말과 함께 이혼을 막고 부동산 특별법이 스르륵 물건너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여기에 현실정치의 핵심이 있다. 대통령의 331억원 재산기부 약속은 지켜져도, 세종시 공약은 지켜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대통령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다’라는 메시지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1977년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특혜 분양받고 그곳에서 출발한 ‘소망교회’에 함께 다닌 정재계 인사들, 강남이 고향이며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하고 “누군가의 아빠이자 엄마”인 그들의 개인적 행복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 이웃이 아니면서, 그 이웃이 되고자 하는 욕망, 대통령 개인의 성공을 국민 개개인의 성공으로 환치시키고 오인하는 과정을 통해 ‘성공한 사업가’ 이명박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불행한 대통령을 가진 국민은 불행하다. 그러나 대통령이 행복해진다고 국민이 행복해지진 않/는/다. 양극화는 극으로 치닫고, 공화주의적 가치는 실종된 ‘주식회사 대한민국’에서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궤변은 마치 MB의 변신론(辯神論)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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