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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안개 같은 질문
고경태 2009-11-20

<파주>

선배는 왜 이런 일을 하세요? 20년째 운동가의 길을 걷는 한 여자선배에게 물었다. 50대를 코앞에 둔 그녀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을 두루 섭렵한 뒤 지금은 자신의 생활근거지에서 이주노동자 인권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처음에는 멋져 보여서 시작했는데, 그 다음에는 갚을 게 많아서였고, 지금은 그냥 할 일이 자꾸 생기는 것 같네”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쏘아붙였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그리고 덧붙였다. “야, 어떻게 술 한잔 안 마시고 그런 진지한 이야기를 하냐?”

그녀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뜸을 들이더니 결국 말했다. “즐거워서 했지. 진짜 즐거웠어.” 다시 물었다. “지금도 즐거워요?” “좀 부족해. 어떻게 해야 더 즐거울지 고민이야.” “왜 해요?” “사회를 바꾸고 싶잖아.” “다르게 살면 안돼요?” “이 일 때문에 내 삶이 송두리째 빼앗기는 느낌은 안 들어. 다만 현실을 고스란히 안아야 한다는 게 힘들지.” “동료들은 괜찮아요?” “엉킨 게 많을 거야.” “그게 뭔데요?” “운동하는 사람들은 계단식 삶을 안 살았잖아. 개인적 성취가 없다보니 자기 발전이 없었고, 그래서 경쟁에 약하지. 그만두면 무엇을 할지 답답하고.”

선배는 왜 그런 일을 했어요? 10년간 운동가의 길을 걷다 접은 한 남자선배에게 물었다. 40대 중반의 그는 1980년대 후반 대학에서 제적된 뒤 노동현장에 위장취업하여 헌신적으로 싸웠다. “노동운동 이외엔 정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어. 한치의 의심없이 혁명을 꿈꾸던 시대였잖아.” “좋았어요?” “좋았지. 정말 투쟁이 재밌었어. 노동운동이 고양될 때였고 투쟁대상이나 명분이 확고했으니 성과물도 딱딱 나왔지.” “왜 그만뒀어요?” “몇년 지나니까 할 일이 없더라.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노동자 출신 리더들이 속속 생겨나다 보니 말야. 무엇을 해야 할지 앞이 잘 안 보이고.” 전화통화를 끝내고 10분 뒤 선배에게서 예상치 못한 문자메시지가 왔다. “그런데 그곳의 리더였던 노동자 출신 내 친구가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지난주 죽었다.” “-_- 왜 그랬을까요?” “오랜 세월 노조위원장 하면서 힘겨워 했거든. 나는 탈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없었나봐.”

왜 이런 일을 하세요, 는 요즘 여러 매체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영화 <파주>속 질문이다(답변은 이 글에 숨어 있다). 철거용역이 물대포를 쏘는 현장에 선 중식(이선균)에게 처제 은모(서우)는 그렇게 묻는다. 나 역시 <파주>를 보다 그 한마디에 기습당한 기분이었다. 정말 왜 하세요? 나에게도 묻고 싶었고, 중식처럼 진심으로 운동했거나 운동하는 사람들에게도 묻고 싶었다. 답을 듣고 났더니 영화보다 더 우울한 안개가 피어오른다. 독자 여러분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시라. 지금 왜 이런 일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