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영화제가 추가되었다. 이번에는 영화와 건축이다. 이 두 영역은 한국의 영화담론에서 제대로 조명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영화와 건축은 그 본성에서 매우 유사한 예술 영역이다. 가령 영화예술의 본성을 규명한 ‘바이블’로 여전히 널리 읽히는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베냐민의 글을 보라. 저 유명한 에세이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1936) 뒷부분에서 베냐민은 영화예술의 원형적 형태를 건축에서 찾고 있다. 영화는 회화나 사진과 달리 대중적인 오락물이며 정신을 집중시키는 대신 분산시키거나 산만하게 만든다. 이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장구한 역사를 지닌 건축술의 수용 형태와 같다는 것이 베냐민의 주장이다. 한 가지 더.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글 <몽타주와 건축>(1939)은 어떤가. 에이젠슈테인은 이 글에서 몽타주를 근간으로 하는 영화의 창작 원리가 기본적으로 건축술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영화 관객은 비록 극장에 앉아 있지만, 영화를 본다는 경험 자체는 일종의 경로(path)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는 점에서 건축물을 감상하는 것과 동질적이라는 얘기다.
<마천루>, 미국 자본주의의 사상적 토대
이 작은 영화제를 소개하면서 모더니즘 시기의 예술 환경을 들먹이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영화제의 개막작인 킹 비더의 <마천루>(The Fountainhead, 1949)가 모더니즘 예술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꼽히는 아인 랜드의 동명 원작 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건축을 주제로 한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품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모델로 한 하워드 로크(게리 쿠퍼)라는 천재적인 건축가가 사회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건축적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내용이다. 집단이 아니라 개인의 창조력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이 작품의 철학적 기반은 오늘날 미국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한 사상적 토대로서 많은 논란을 낳았다.
이 소설이 발표되던 시기인 1943년은 대공황 직후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정책을 추진하던 때와 겹친다. 당시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공공사업 촉진국이 설립되었으며, 예술가는 정부의 일자리 마련 시책에 따라 싼값에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에 차출되었다. 그러한 벽화들은 대부분 미국 건국의 역사를 그리는 사실주의 회화들이었다. 그러나 아인 랜드는 뉴딜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예술가는 집단이나 사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상을 위해 작품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천루>는 합리적 개인주의의 미학적 결과물이며, 하워드 로크는 아인 랜드의 그러한 예술관을 집적한 인물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의 신뉴딜정책이 시행되면서 정치적 보수파 사이에서 아인 랜드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물론 <마천루>는 정치적인 메시지가 강한 영화는 아니지만, 그 미학적 바탕에는 좀더 깊은 논쟁적 이슈가 담겨 있다.
나머지 네편의 외화는 현재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건축가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시드니 폴락의 유작인 <프랭크 게리의 스케치>(Sketches of Frank Gehry, 2006)는 가장 화려한 면모를 자랑하는 작품. 현대 미술과 건축에 약간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한번씩 들어봤음직한, 미국 컨템포러리 예술계를 움직이는 명사들이 대거 등장한다.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LA의 디즈니 콘서트홀 등 마치 번쩍이는 조각 작품을 보는 듯한 건축물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은 게리의 건축 세계를 근거리에서 밀착 취재한 영화다. <렘 콜하스: 도전과 혁신>(2008)은 한결 더 ‘영화적인’ 건축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삼성미술관 리움이나 서울대 미술관, 경희궁의 ‘프라다 트랜스포머’ 등 국내에서 여러 차례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네덜란드 건축가 렘 콜하스는, 프랭크 게리나 자하 하디드 등과 더불어 해체주의 건축을 이끄는 당대 최고의 건축계 스타다. 청년 시절에는 글쓰기에 매료되어 신문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 그 이후에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연기를 하기도 했다. 그가 젊은 시절 <스피드>의 얀 드봉 감독과 함께 네덜란드의 젊은 영화인 집단에서 창작 활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건축 프리젠테이션 쇼케이스도
<노먼 포스터와 거킨 빌딩>(Building the Gherkin)은 건축 자체보다는 도시 계획에 무게중심을 둔 작품이다. 노먼 포스터는 홍콩 상하이은행 본사, 베를린 국회의사당 등을 디자인한 영국의 대표적인 건축가. 그의 최근 역작인 거킨 빌딩은 전통과 역사로 대변되던 런던의 이미지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만한 시도였기 때문에 착공 당시부터 많은 사회적 논란을 불렀다. 영화는 이 빌딩의 건축주인 스위스 재보험회사 관계자를 밀착 인터뷰하고, 설계 회사인 포스터 & 파트너스 안팎을 돌아보며, 런던 시장과 도시 계획가의 의견을 모두 경청한다. 아직 건축물이나 건축가를 제대로 다룬 영화가 전무한 우리의 상황에 비춰볼 때 벤치마킹해도 좋을 참신한 시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마이 아키텍트>(My Architect, 2003)는 현대 건축의 가장 뛰어난 성과들을 남긴 미국 건축가 루이스 칸의 삶을 그의 사생아인 영화감독 너새니얼 칸이 추적한 다큐멘터리다. 모더니즘의 기능주의 건축을 지양하고 침묵과 빛을 건축의 요소로 끌어들이면서 영원 불멸의 작품을 남기고자 했으나 결코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았던 아버지의 족적을 되밟는 애틋하고 감성적인 다큐멘터리다.
우리는 건축을 문화의 한 영역으로 예술의 한 형식으로 제대로 감상하고 안목을 높일 만한 기회를 갖지 못했다. 서울국제건축영화제는 이러한 현재의 문화적 환경을 바꾸려는 시도로 일반 관객이 영화 관람 뒤에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국내 건축가의 작품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자리를 준비한다. ‘호스트 아키텍트 포럼’(Host Architects’ Forum)이라는 타이틀 아래 국내 건축계에서 크게 호평받아온 건축가를 초청해 국내 최초의 건축 프레젠테이션 쇼케이스를 시도한다. 그 밖에 모든 상영작에 대한 다양한 강연과 대담 프로그램을 꾸렸다. 이현승 감독이 <마천루> 상영 이후 관객과의 대화에 나서며, 건축을 전공한 젊은 영화감독인 김성호, 박대민(<그림자살인>), 이용주(<불신지옥>) 감독이 <렘 콜하스: 도전과 혁신>에 이어 대담을 나눈다. 한 나라의 대표적인 역사적 건축물이 방화로 전소되는 기이한 현실을 살아가는 지금, 서울국제건축영화제는 영화를 통해 건축이 문화이자 상식이 되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