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동안 우리 모두 너무 많은 죽음을 경험했고, 너무 많이 상심했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눈물을 흘린 걸까. 죽음들의 허무함? 함께할 수 없다는 슬픔? 죽음을 부추긴 세상의 부조리? 그 무엇도 가장 큰 답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울었을 것이다. 허무함을 이해하고, 슬픔을 이겨내며, 부조리를 참고 사는 건 온전히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애도는 그래서 (김훈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적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산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훈의 신작 <공무도하>는 레테의 강을 건너지 않은 ‘이쪽 편’ 사람들에 대한 우회적인 애도다. 굳이 ‘우회’라는 표현을 사용한 건 이 애도가 ‘애도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애도이기 때문이다. 장마전선이 한반도에 찾아와 폭우를 쏟아내는 첫 장면부터, <공무도하>는 김훈 특유의 스트레이트한 문장들을 맹렬히 쏟아낸다. 형용사와 부사, 혹은 그 어떤 감상도 배제된 문장들은 신문 지면을 가득 채운 기사체 문장처럼 메마르고 차갑다. 마침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기자가 업이다. 신문기자 문정수가 취재차 내려간 바닷가 마을 해망에서 겪는 여러 사건들이 <공무도하>의 중심 내용이다. 개에게 물려 죽은 아들을 외면하고 숨어버린 엄마, 화재가 발생한 백화점의 귀금속을 남몰래 털고 퇴직한 소방관, 크레인에 깔려 죽은 딸의 위자료를 챙겨 마을을 떠나려 하는 아버지가 이곳에 살고 있다. 이들의 삶은 윤리나 이성의 영역과는 거리가 멀고, 고단하다. 보고 들은 세상을 ‘되는’ 기사와 ‘안되는’ 기사로 나누어 재단해야 하는 신문기자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다. 문정수는 삶과 직업에서 느끼는 짙은 패색감을 자주 애인인 노목희에게 고백한다. 그때마다 노목희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둘 다 불쌍해. 불쌍하고 가엾어.”
스치듯 지나가는 노목희의 연민 어린 대사에도, <공무도하>는 어떤 인물도 위로와 평안을 얻지 못한 채 끝을 맺는다. 무심하게 전개되는 문장이나 상처를 굳이 보듬으려 하지 않는 결말에 불안감을 느끼는 독자도 더러 있을 것 같다. 다 읽고 나면 이런 불안함이 왠지 더 편하고 익숙하게 느껴진다. 그게 바로 ‘강 이쪽 편’의 현실이니까. 남의 비루함과 치사함과 던적스러움이 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길티한 안도감을 느낀다고 해야 하나. <공무도하>는 그렇게 세상을 애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