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전영객잔
[전영객잔] 심리적 놀라움을 경험하다

<디스트릭트9>과 <파주>가 만들어낸 몽타주

<디스트릭트9>과 <파주>를 생각한다. 생각했다라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지역, 지리적 공간을 지칭하는 제목을 단 두편의 영화가 비슷한 시기에 극장가를 찾아와 만들어낸 몽타주에 대한 글쓰기가 될 것이다.

<디스트릭트9>의 초반은 이상한 방식으로 관객을 흥분시킨다. 디스트릭트9이라는 게토에 거주하는 외계인의 굴종성, 비천함에 대한 재현과 동시에 프레임을 지배하는 불시착 우주선이라는 ‘숭고’한 스펙터클의 기묘한 동거 때문이다. 혹은 영화의 속도 때문이다. 이 속도는 다른 액션영화들이 속도의 효과를 거두어내는 방식, 감지하게 하는 방식과 다르다. 예컨대 풀 스피드의 자동차나 항공기 혹은 그것을 기가 막히게 통제하면서 가속도를 얻어내는 주인공의 몸으로부터 튀어나오는 땀과 에너지, 근육이 액션영화의 속도의 지표라고 한다면, <디스트릭트9>에서 느끼는 속도감에는 그러한 것들이 없다. 그 부재를 대신하는 것이 예의 우주선 공중 부양, 인물에 대한 동일화 장치가 부재한 탓에 플롯의 안착 지점을 예측하기 어려운 심리적 불안과 빠른 편집, 그리고 외계인 관리국과 외계인, 또 나이지리아 불법 거래자들의 삼각 구도가 만들어내는 멈추지 않는 싸움질이 이 영화의 드로몰로지, 경주, 달리는 행위, 민첩한 움직임이다. 즉 영화 속 생체적 속도와 기계적 속도는 빠르지 않는데, 영화 전체는 속도감있다.

빛의 속도를 넘어 우주를 건너왔을 외계인들은 그 생김새를 따라 ‘프론’(새우)으로 불리고 지성이나 조직화된 저항의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 수도나 전기, 교육 시설 없이 쓰레기를 뒤지면서 살아가야 한다. 육체적 힘은 인간보다 강하고 그래서 가끔 폭력적 상황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굴종으로 그들은 28년간을 살아왔다. 일제강점기보다 7년 빠지는 시간이다. 포스트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체제) 시대의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유색인종 대 백인의 차별 구도가 인간 대 비인간 지구인 대 외계인으로 치환·재생산되는 구조는 그럴듯해 보이고 흥미롭지만 동시대 남아공의 정치적 알레고리로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박스 집들이 늘어선 게토 지역을 영화의 배경으로 100% 활용함으로써 로케이션 매니저의 시점에서는 예산도 절약되고 하이퍼 리얼리즘 효과도 있다. 하지만 1995∼97년 남아공 흑백연합정부는 세계적인 존경을 끌어낸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를 만들어 보복 대신 용서의 시대를 연 바 있고 4개 인종 11개 종족으로 구성된 레인보우 다문화 국가다. 그리고 신흥 흑인 중산층, 블랙 다이아몬드로 불리는 소비계층이 경제성장을 끌어올리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 등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포스트 인종차별체제 시기다. <디스트릭트9>은 그러나 포스트를 떼버린 채 요하네스버그라는 도시 공간을 점유한다.

반면 시간상으로 이 영화가 활용해내는 뛰어난 점은 ‘유예’다. 대부분의 SF영화에서 UFO가 보이는 순간은 바로 지구군과 외계군단의 전투로 이어지나, 이 영화에서 UFO는 도시의 상공에 불시착한 상태로 놓여 있다. 결과적으로 두개의 시간이 유예된다. 하나의 예의 전투태세, 일촉즉발할 수 있는 시간이 멈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계인의 궁극적 귀환, 혹은 탈출 내지 엑서더스의 시간이다. 영화의 순간순간마다 도시 상공에 뜬 우주선이 프레임에 들어오면서 이러한 유예적 긴장이 환기된다.

이러한 시간적 유예 속에서 심리적 속도전은 빠른 편집, 삼파전과 더불어 묘미를 발휘한다. 전쟁과 영화 장치의 상호 보충 관계를 규명해온 폴 비릴리오는 진정한 전쟁영화는 반드시 전쟁이나 전투 장면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영화가 기술적, 심리적으로 놀라움을 창조하는 데 적합한 것이 된 시점에서 영화는 사실상 무기의 범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SF장르 빌린 신자유주의의 자화상

외계인을 형상화하는 데서 영화는 절대적 위계체계를 가진 집단으로 <디스트릭트9>의 외계인들을 설정한다. 즉 지도자 집단이 없는 이들은 그저 하위주체이며 지구 생물 중 프론, 새우를 연상시킨다. 독재자 일인이거나 지도 집단체제인 듯하다. 약간 얼간이기도 한 비커스(샬토 코플리)도 매력 넘치는 주인공은 아니다. 폭력적이거나 위협적이진 않지만 디스트릭트9에 있는 외계인들을 디스트릭트10으로 강제 이주시키려는 형식적인 서류 작업, 사인을 유도하는 ‘MNU’(외계인 관리국)의 직원이다. 그것도 장인의 배후를 입어 이번 일의 총책을 맡았다.

이 영화가 비판한다기보다는 내면화하고 있는 것은 “약한 자, 아무도 돌보지 마라”를 기조로 하는 신자유주의의 정부 관리 형태인데 즉 친외계, 친타자쪽으로 기울고 자신도 외계 형태로 변하는 비커스 그리고 지도자 외계인 크리스토퍼까지를 포함해 그 누구도, 그 어떤 조직도 공공성에 대한 이해나 실천이 없다. 남아공 권력자들이 노리는 것은 외계인 DNA로 조작할 수 있는 외계인들의 강력 무기 사용이며 크리스토퍼도 다른 외계인들과 거의 고립 상태로 친구 한명, 아들하고만 교감을 이루면서 귀환 기술 개발에 골몰한다. 외계인들의 모습을 공포나 경이가 아닌 새우 수준으로 처리한 것은 분명 특이하다. 또 비커스가 외계인 DNA에 감염되어 변해가는 모습을 <플라이>의 제프 골드블럼과 견주어보면 남성성 성적 에너지의 강화가 아닌 희화화다. 근력은 늘어나고 외계 DNA를 갖춘 무기로서의 신체 가치는 증가하지만 외계인과 성관계를 맺었다고 오도되고 매장되고 추격당한다. 아내로부터도 버림받는다. 외계인들이 고양이 음식, 캣푸드에 ‘환장’한다는 설정도 우스꽝스럽다(난 많이 웃었다. 심야극장에서). 공포나 SF영화는 타자의 문제를 다룬다는 면에서 매카시 정국이나 냉전시대의 탁월한 알레고리로 기능해왔다. <The Thing>(1951),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1956) 등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디스트릭트9>은 타자에 대한 돌봄, 공공성 자체가 사기업의 잉여 비즈니스 대상으로 변하고 빈부격차는 심하며 게토와 게이티드(gated) 커뮤니티, 일명 요새화된 중상층 거주지역이 완벽 분리된 신자유주의 사회의 SF장르를 빌린 자화상이다. 비판적이라거나 알레고리적이라기보다는, 어떤 현상에 대한 관찰과 과장이 SF로 변장된다고 보아야 한다. 영화에서 배신되지 않는 단 하나의 고리는 외계인 크리스토퍼와 아들과의 관계다. 영화 <애자>에서 정성을 쏟아 복원하는 돌봄의 노동 고리가 엄마와 딸의 관계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 질서는 세계 자본주의 질서이며 이 때 각국 영화적 재현은 외양은 다르지만 중핵에서는 유사한 방식으로 이 새롭고 곤궁한 노동 배열에 반응한다. 또 국민이 아닌 난민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외계인 크리스토퍼이기도 하다. 외계인으로 변한 비커스의 쓰레기를 뒤지는 모습이다.

<그들도 우리처럼>과 <초록물고기>가 떠오르다

<파주>, 이 영화는 파주에 들어서는 한 소녀 최은모(서우)의 짧은 귀향기의 현재와 과거를 설명하는 플래시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 <파주>에 대한 기사를 검색하다 보면 이 영화가 2003년 3월에 파주로 돌아온 최은모를 설명하는 내용도 있지만, “경기도 파주 푸르지오 아파트 무조건 잡아라”라는 뉴스도 뜬다. LG그룹이 거대 LCD 클러스터를 세울 계획이 있기 때문이란다. 2009년 10월28일자 기사다. <디스트릭트9>의 거주민 강제 이주와 크게 다르지 않은 파주 지역민들의 집단 이주가 영화와 뉴스로 미루어보자면 지난 6년간 일어난 셈이다.

영화 <파주>는 이렇게 개발이 이루어질 파주에서 부모를 여의고 언니와 살아가는 10대 소녀 최은모와 그녀의 형부로 들어온 김중식(이선균)의 상해 보험금과 개발 현장을 둘러싼 의심과 비밀 그리고 친밀성에 기반한 관계를 다룬다. 난 이 영화에서 좀더 깊게 다루어졌으면 했던 부분은 최은모가 언니에게 돈 때문에 형부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돈을 벌어야지 하고 결심하는 지점이다. 10대 미성년 소녀의 사회적 무력감, 심리적 굴절이 잘 표현된 부분이다. 평범한 성장담과는 다른 이런 고착, 집착, 투사의 동학이 소녀에게 발견되는 장면이 흥미롭다. 한편 김중식은 90년대 박광수 감독의 영화에서 문성근씨가 맡았던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있으나 심리적으로 엉클어진 지식인의 부활처럼 보인다. <그들도 우리처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한국영화에서 어느 정도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사회적 실천을 하는 남성 지식인 유형 말이다. 그리고 파주라는 배경은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의 일산을 연상시킨다. 형부와 어린 처제의 관계라는 카피를 갖고 있지만 <파주>는 여성감독 박찬옥이 미묘한 방식으로 위 영화들을 계승한다고 느끼게 한다. 중요한 차이점이라면 리얼리즘의 투명성 대신 마음의 심연 속에 웅크린 미혹과 매혹의 심리를 미스터리로 설정하고 파주의 안개로 그것을 표면화한 복합성 같은 것이다. 그리고 위 김중식의 믿음과 헌신을 뒤흔드는 어린 소녀 최은모의 교란적 역할이 흥미롭다. 김중식에 대한 그녀의 거절, 불신 부분도 전 세대 일부 남성 지식인의 행태에 대한 언급으로 보자면 비판의 심도가 있다. <씨네21> 전문가 20자평에서 김봉석은 “인물과 이야기 어디에도 논리와 일관성은 없다”라며 별 2개를 주었고 김용언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안개 같은 미스터리의 매혹”이라고 별 4개를 주었다. 나는 이 평자들이 이 영화가 주는 스펙트럼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글을 맺으려 한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