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유치한 거 좋아한다고 했냐 안 했냐!”
애인 현준(이병헌)에게 화이트데이 사탕 선물을 내심 기대하던 승희(김태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누구에게도 빈틈이라곤 내보이지 않던 사람이, 한번 마음 가는 곳을 정한 이후부터는 주저하지 않고 내숭떨지도 않는다. 타인의 숨겨진 성향을 단숨에 파악하는 직업과 달리, 그녀의 사랑은 감출 것도 거리낄 것도 없다. 그녀는 직선으로 뜨겁게 내리꽂힌다.
국내 최초 블록버스터 첩보액션드라마 <아이리스>의 프로파일러 최승희 역은 놀랍도록 김태희의 몸에 찰싹 잘 달라붙는다. 전작들이 김태희라는 스타의 강고한 이미지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구미호외전> <중천>), 거꾸로 무리하게 없애려는 노력(<싸움>)이었음을 상기해보면 ‘똑똑하고 쿨하고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확고한 이미지는 이상하리만치 소극적으로 반영되어왔다. 하지만 승희 역은 그 스타성을 피하지 않아도 된다. “외향적이고 강한 에너지가 있고 당당한” 승희는 김태희의 몸을 빌려 “지나치게 보이시하지 않게, 또 지나치게 얌전하지만은 않은 여성스러움”으로 태어나며 김태희의 기존 이미지를 흥미롭게 재구축한다. 승희는 자연스럽게 여성스럽고 자연스럽게 섹시하다. “아무래도 나이가 좀 들면서, 성숙한 여성성이 저에게서 나오는 것 같아요. 그전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철없고 어린 캐릭터를 많이 연기했었죠.” 거기에는 김태희의 낮고 또박또박한 말투도 한몫한다. “사실 목소리 때문에 걱정 많이 했어요. 얼굴만 봐서는 여성스럽고 하이톤에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나올 거 같은… 웃는 걸 보니 나만의 오해인가요? (웃음) 실제 목소리는 감정도 잘 드러나지 않는 저음이고요. CF를 찍을 땐 대부분 후시녹음을 해야 할 정도예요. 최대한 하이톤으로, 밝고 천진난만하게. (웃음)”
긴 휴식을 취하는 동안 그녀는 처음으로 장기적인 연기 트레이닝을 받았고, 또 공부로 배울 수 없는 것과 현장에서 배워야만 하는 것들을 오랜만에 돌아온 <아이리스> 카메라 앞에서 깨쳤다. 그녀는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구나’라고 절감하며 불안과 걱정을 오가다가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배웠다고 했다. “대사하듯 말하는 게 아니라 말하듯이 말하라는 거. 그 당연한 걸 지금까지 간과했던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 연기는 믿음이라는 것. 그 상황을 믿고, 내가 최승희라는 걸 믿는 것. 그 깨달음이 제 태도를 많이 바꿔놓았어요.” 유치한 거 좋아한다고 했냐 안 했냐, 라는 대사를 치는 것까지 김태희에게는 조그만 도전이었다. 본인이 평소에 그런 말투를 쓰지 않기 때문에 그 낯선 어미가 입 안에서 겉돌았다고 했다. 했니, 혹은 했어라는 식으로 바꿀까 생각도 했지만, “병헌 선배가 ‘이건 밀어붙여볼 만하다, 그 말투 어미 하나가 너의 캐릭터를 한번 더 보여줄 수 있다’고 권했어요. 그게 나라고, 태희라고 생각하니까 어색한 거지 승희에게는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어요.” 김태희에게는 그 작은 도전이 스스로에게 설정했던 틀을 깨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작품을 더 열심히, 많이 하고 싶다고 했다. “선화 역의 소연이가 <아이리스> 초반 촬영 때 그러더라고요. <아이리스> 쫑파티하는 날 바로 다음 작품 시작하고 싶다고. 깜짝 놀랐죠. 저는 ‘드라마 끝나면 엄청 피곤할 테니까 여행하면서 쉬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웃음) 그만큼… 부담감에 짓눌려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그게 완전히 없어졌고 제가 편하게 즐기고 있다는 뜻은 아니에요. 지금도 분명 부족한 게 제 눈에 보이고, 그걸 사람들이 지적할 땐 너무 아파요. 힘든 과정이지만, 그래도 <아이리스>를 50% 이상 찍고 난 지금은 다음 작품이 기대돼요.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렸을 때 사람들이 그걸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작품을 빨리 만나고 싶어요.”
<아이리스>에서 그녀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세 남자를 매혹시켰다. 현준에겐 압도적인 지성으로, 사우(정준호)에겐 생머리를 늘어뜨린 참한 아름다움으로, 그리고 테러리스트 다카시에겐 <드림걸즈>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화려함으로. 그리고 그것들은 여태까지 김태희를 바라보았던 관객의 욕망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 익숙한 이미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씩 열거하면서, 그 사이사이로 승희의 맨얼굴을, 이성을 압도하는 열정을 내비치며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해나간다. 그건 김태희의 맨 얼굴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