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설은 대개 책 말미에 평론가의 서평을 싣는다. 모든 서평을 다 읽는 건 아니다. 굳이 읽지 않아도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내용도 있는 법이니까. <북쪽 거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서는 달랐다. 재빨리 서평이 있을 다음 페이지를 폈다. 누군가의 설명에 기대서라도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인지를 정의하고 싶었다. 김형중 평론가의 글이 마침 작은 위로가 되어줬다. “사력을 다해 읽거나, 혹은 가급적 이른 시기에 읽기를 포기해야 할 책. 한국 문학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실험정신으로 유명한 문제작이 되거나, 독자라고는 몇몇 평론가들과 운없는 다독 시민 몇과 소수의 문창과 학생들밖에는 갖지 못하게 될 저주받은 책이 되거나 할 수 있도록.”
그러므로 지금부터 쓰게 될 내용은 단단히 각오가 되어 있는, 문학적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 <북쪽 거실>은 정체불명의 수용소로부터 석방된 여자, 수니로부터 시작한다. 수니는 전직 오디오북 성우로, 수용소에 남겠다는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거부당한다. 그녀는 출소해 옛 애인(이자 남편)인 전직 신문기자 희태의 집에 머문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만 상대방을 구속하지는 않는 사이다. 어느 날 갑자기 수니가 행방불명되고, 희태의 집으로 수니의 오디오북 팬이라는 순이라는 여자가 무작정 찾아온다.
이처럼 인물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 전제되면서부터 이야기와 목소리는 콜라주되기 시작한다. 수많은 쉼표로 점철된 문장은 끝나지 않으며, 단어의 사이사이에는 부연설명을 위한 대시 표시가 끊이질 않는다. 수니의 목소리로 전개되던 이야기는 어느새 희태의 목소리로 변하고, 곳곳에 등장하는 희태의 사촌 강은희와 ‘린’이라고 불리는 희태의 또 다른 애인은 심지어 동일인물인지 다른 인물인지조차 분간이 어렵다. 그렇다고 읽는 것을 멈출 수도 없다. 혼란스러워 책을 덮을 무렵이면 어김없이 등장인물에 대한 단서가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등장한다. 때문에 다 읽고 나면 논리적으로 내용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모른다고 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독자의 억울한 심정을 예상했다는 듯 작가는 이 작품의 창작 의도를 간호사의 목소리 속에 슬쩍 끼워놓았다. “난 꿈이 주인공이 되어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책이 아니라, 이 모든 내용은 결국 꿈인 것으로 밝혀졌다, 하고 끝나는 책이 정말 싫었어요. (중략) 꿈은 어쩌면 문학일 거예요. 자신이 낭독자이자 청자가 되는 오디오북 말이죠.” 그 자체로 꿈같은 책이란 말이다. 읽거나 포기하거나, 선택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