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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클럽] 영화의 목적은 역사 교육이 아니다

영화평론가로서 어떤 영화는 개인적인 위험을 감수하고 비평해야 할 때가 있다. 귀여운 강아지들이 나오는 영화를 혹평하려면 동물을 싫어하는 매정한 인간으로 비쳐질 것을 감수해야 하고, 힘든 상황을 극복한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에 관한 영화를 보고 너무 감상적인 쓸모없는 영화라 비평할 때는 편견에 가득 찬 둔감한 인간으로 비쳐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영화감독의 의도가 휼륭했다 해도 영화평론가는 영화가 나쁘면 나쁘다고 얘기해야만 한다. 실제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영화를 비평할 때도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관객은 이런 영화에 대해 강한 의견을 갖게 마련이다. 영화가 관객의 생각에 맞게 역사를 해석하면 그 영화를 지지하겠지만, 영화가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해석하면 관객은 이를 비판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영화평론가를 필요로 하겠는가?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나는 <작은연못>이라는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다. 이 영화는 내가 한동안 보기를 고대해왔던 영화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나는 내가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했음을 깨달았다. 미국인으로서 미군이 한국전 당시 많은 수의 한국인을 참살한 사건에 대한 영화를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던 그 영화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영화감독들이 별로 효과적이지 않은 영화 전략을 채택했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관객이 동일시할 수 있는 두세명의 인물을 중심인물로 설정하는 데 반해, <작은연못>은 의도적으로 이런 접근법을 피하고 많은 수의 인물들에게 조금씩 시간을 할애한다. 이것은 누군가의 삶이 그 누구의 것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는 민주주의적인 제스처일 수 있겠으나, 그 결과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결국 실제 인물이기보다는 추상화된 관념의 표현으로 보인다.

이야기는 극도로 간단하다. 우리는 미군이 도착하기 전 마을 사람들이 목가적이고 순수하게 사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미군이 그들에게 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그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우리가 영화에서 볼 수 없는 미군 장교가 내린 명령에 따라 그들 모두가 죽는다. 영화의 목적은 우리가 그 사건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가운데에 카메라를 위치시키는 데 있다.

나는 영화제작자들에게 왜 이런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영화를 만드냐고 질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라건대 그 이유가 단지 700만장의 티켓을 팔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이 단순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1999년 <뉴욕타임스>와 <AP통신> 기사를 통해서 노근리 사건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이 영화를 통해서 보는 것보다 훨씬 감정적으로 동요되었다. 물론 영화는 특정 사건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영화로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 때는 그 이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역사적 참상을 다룬 영화로, 나는 1972년 북아일랜드에서 영국군이 스물일곱명의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한 사건을 다룬 폴 그린그래스의 <블러디 선데이>(2002)를 최고의 영화로 꼽고 싶다. 이 영화에서 그린그래스는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여러 다른 관점에서 동시에 보여준다. 덕분에 관객은 그 사건의 양쪽에 있던 인물들이 어떻게 느꼈는가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를 마음 편히 볼 수 없는 이유는 이 영화가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도울 뿐만 아니라 이런 참상이 얼마나 쉽게 일어날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역사적 참상을 다룬 대부분의 영화는 이 영화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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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이서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