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먹다>로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했던 김진규가 두 번째 소설을 출간했다. 그런데 심각한 어조의 전작과는 달리, 이번에는 술술 읽히는 대중성이 두드러진다. “쓰는 내내 노는 마음이었다”는 작가의 말대로,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은 독자에게 마당놀이 한판을 보는 듯한 유쾌함을 선사한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일일드라마나 시트콤으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배경은 조선 영정조 시대의 한성부 중 ‘명례방’ 즉, ‘남촌’이라 불리는 곳인데, 당시 정치적·사회적인 흐름보다는 현대에도 충분히 적용될 법한 다양한 인간들에 무게중심을 둔다. 그것도 양반보다는 중인이나 노비, 귀감이 될 만한 선비보다는 아둔하고 삽질을 일삼는 중년 사내들로 가득하다. 하나같이 한심한 인생들이지만, 왠지 밉지가 않다.
제목에서 말하는 ‘280일’이란 공생원의 아내인 ‘마나님’이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는 기간이다. 공생원은 올해 마흔다섯살의 한량인데, 마나님이 결혼한 지 스물세해 만에 아이를 가졌다. 남들은 이미 손자를 보고도 남을 나이라 왠지 남우세스럽기도 하거니와, 더 환장하겠는 건 의원의 청천벽력 같은 불임 선언이다. “생원님이 문젭니다. 마나님 탓하실 것 없지요.” 이때부터 공생원은 체질에 맞지도 않는 탐정 노릇에 나선다. 추리력은 셜록 홈스의 개만도 못하지만, 일단은 이웃집 노비에서부터 마나님의 팔촌까지 모조리 용의선상에 올려놓는다. 의원 채만주, 참봉 박기곤, 두부장수 강자수, 점포상 황용갑, 시정잡배 백달치까지. 그러나 불행히도 하루가 다르게 오락가락하는 용의자들 틈에서 범인이 좁혀지기는커녕, 소심한 공생원의 영혼만 피폐해질 뿐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발가락이 닮았다>의 추리 버전 혹은 개그 버전이라고나 할까. 공생원의 아둔한 추리놀음을 지켜보노라면, 마나님의 임신에 대단한 비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게다가 마나님은 불륜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대한 육체와 뻣뻣한 성격의 소유자다). 예상대로 다소 싱거운, 그러나 유쾌한 반전으로 끝나고 말지만, 이 소설의 백미는 사건이 아니라 공생원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생생한 묘사에 있다. 특히 운율에 맞춘 듯 쫄깃쫄깃한 김진규의 문장력은 탁월하다. “돌풍이 괴성을 지르며 골목을 쏘다녔다” 혹은 “질식을 인내하던 하늘이 노랗게 각혈을 시작했다” 등 자연을 의인화한 독특한 묘사도 일품. 요즘 무겁고 우울한 한국 소설들의 틈새에서 간만에 한바탕 웃음을 주는 소설이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