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그룹의 사람들에게 아주 재미없는 영화를 보여준 뒤, 밖에 나가 열명의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재미있다고 이야기하고 오면 돈을 주겠다고 했다. 한 그룹에는 100달러, 다른 그룹에는 1달러씩을 주기로 했다. 두 그룹 사람들 모두 밖에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화가 재미있다고 이야기하고 돌아와 약속한 돈을 받았다. 이들이 귀가하려고 할 때 심리학자가 지나가듯이 물었다. 그런데 영화가 진짜 그렇게 재미없었나요? 그러자, 예상 밖의 답변이 나왔다. 아주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두 그룹 사람들 중 과연 누가 그랬을까?
1달러를 받은 쪽이다. 100달러를 받은 사람들은 ‘까짓’ 크게 잘못될 일 없는 거짓말을 하고 100달러를 받은 반면, 1달러를 받은 사람들은 고작 1달러를 받기 위해 ‘무려’ 열명에게나 거짓말을 한 것이다. 100달러의 보상으로는 거짓말을 한 행위가 설명이 되지만, 1달러로는 스스로 설명이 안된다. 마음이 불편하다. 자존심도 상한다. 그러니 차라리 영화가 진짜 재미있다고 믿어버리는 쪽이 속 편하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 이 ‘1달러짜리 피험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지 모른다. 얼마 전 칼럼에서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이 곤두박질치지 않는 신종 미스터리를 탐구한 적이 있는데, 같은 맥락에서 고민을 진전시키게 된다. 왜냐. 눈만 뜨면 헉 소리 나니까. 나아가 우울하니까.
방송인 김제동을 최소한의 설명조차 없이 하차시켜버리고, 4대강 파내기 사업을 비판한 환경운동연합의 라디오 광고를 막아버렸다. 정부청사 공무원들에게 먹이겠다던 미국산 쇠고기는 알고보니 정부청사 지키는 전경들에게만 먹였다. 반향이 큰 비판을 한 이들은 해고, 파면, 정직으로 밥줄을 끊고, 시위 군중은 손해배상으로 입을 틀어막고, 자기들이 피할 도리 없는 고발에 대해서는 ‘국가’의 명예훼손 타령을 한다. 이런 행태를 따질 현재로선 유일한 공간인 국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국정감사 자료 제출 거부는 기본, 주나마나한 자료나 엉뚱한 답변을 내놓기도 한다. 심지어 묵비권까지 행사한다. 한마디로 ‘너희는 짖어라, 우리는 안 듣는다’이다. 국민을 무시하니 국회도 무시한다. 우리가 고작 이꼴 보자고 현 정권을 탄생시킨 거다. 게다가 내 주머니에는 그나마 1달러도 들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