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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 품는 밤] 눈먼 개와 나의 모텔 여행기
이다혜 2009-10-15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펴냄

“모텔은 은밀하고, 아주 거의 외설적이다.” ‘쉬었다’ 가는 커플에게 그 은밀하고 외설적인 모텔의 특성은 당연하고도 반가운 것이겠지만 맨송맨송하게 ‘자고’ 가야 하는 일행 없는 여행자나 출장을 간 사람이라면 모텔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 은밀함과 외설에 다소간 치이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하물며, 눈먼 개와 함께 여행하는 남자는 어떻겠는가.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의 주인공 지훈은 그런 생활을 3년이나 해왔다. ‘아라비안’, ‘달과 6펜스’, ‘바나나’처럼 제멋대로의 이름을 가졌지만 그 속살은 대동소이한 고만고만한 모텔을, 늙고 눈먼 개와 함께 전전해왔다. 세면대 아래,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2009년 8월3일, 나와 와조가 다녀감”이라고 네임펜으로 적어놓는 작은 비밀을 만들면서.

아, 소개가 늦었다. 와조는 지훈이 데리고 다니는 늙고 눈먼 개의 이름이다. 와조는 그의 할아버지가 데리고 다니던 맹인안내견이었다. “녀석에게 이리 와조, 도와조란 말을 주로 하다보니” 붙은 이름이다. 와조는 지훈의 할아버지를 돌진하는 차 앞으로 이끌었던 사고 때문에 눈이 멀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그가 집을 떠날 때 보이지 않는 눈으로 기어코 그의 바짓가랑이를 놓지 않아 결국 그의 동행이 되었다. 그는 길 위에서 만난 사연 많은 이들을 번호로 기억하고 다음 여행지에서 그들에게 편지를 쓴다. 친구를 밀어서 식물인간으로 만든 아이 239, 바닥에 버려진 껌딱지로 예술을 하는 사람 99…. 그러던 어느 날, 지훈은 자기 책을 파는 여자 소설가인 751을 만난다. 지훈의 여행이 끝나기 위해서는 그가 보낸 편지 중 한통이라도 답장이 와야 한다. 지훈은 매일 집 우체통을 확인해주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편지가 왔는지 묻는다. 그런데 소설 제목대로, 아무도 편지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훈의 여행은 계속된다. 어째서인지 751은 그의 동행이 되기를 자처하지만.

지훈이 쓰는 편지를 통해 그의 과거사가 하나씩 드러난다. 왜 여행을 떠났을까? 왜 편지가 와야 집에 돌아간다고 할까? 마지막에 이르면 그 모든 비밀이 밝혀진다. 반쯤은 예측했던 결말로 흘러가지만, 알았다 해도 기꺼운 마음으로 이 이야기에 속아 넘어간다. 건조했던 모텔 방의 공기가, 편의점이나 버스에서 지나쳤던 사람들이 이전과 다른 온기로 다가온다. 이 소설은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간의, 시차를 둔 기묘한 커뮤니케이션인 편지를 닮았다. 덤덤하게 말문을 트더니 마지막 문장에서 기어코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