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공주님 때문이다. 방콕에서 캐주얼 구두를 샀다. 신고 간 운동화로는 공주님을 먼 발치에서조차 알현할 수 없었다. 행사 주최쪽은 ‘엄중한 정장’을 요청했다. 남성은 슈트 상의와 하의의 색깔이 일치하고 넥타이를 매야 했으며, 여성은 무릎 밑까지 내려가는 치마를 입어야 했다. 대충 슈트 상의만 걸치고 간 터라, 현격하게 기준 미달이었다. 아무튼 넥타이를 빌리고 신발을 바꾸는 선에서 입장을 허락받았다. 이게 다 타이 왕실의 우볼 라타나 랏차카냐 스리와타나 판나와디 공주님 때문이다^^.
지난 9월30일 오후 7시, 방콕의 차트리움 호텔에서 열린 방콕국제영화제 폐막식. 공주님은 한 시간이나 늦게 나타났다. 객석에서 불만이 섞인 웅성거림은 전혀 없었다. 공주님이 들어오자 왕실찬가가 울려 퍼졌고 모두 일어서 예를 표했다. 빨간 원피스를 곱게 입은 58살의 공주님은 무대 중앙 의자에 ‘미스코리아 진’처럼 사뿐히 앉았다. 경쟁부문 시상식 때는 ‘그냥 앉은 채로’ 수상자들에게 일일이 트로피를 전달했다. 그리고는 홀로 퇴장. 다시 전원 기립.
방콕국제영화제에 잠깐 다녀왔다. 가장 진하게 와닿았던 것은 역시 왕실의 위력이었다. 폐막식에 공주가 온다는 이유만으로 엄격하게 마련된 드레스코드가 인상적이었고, 영화 상영 직전마다 왕실찬가와 함께 국내외 관객이 일어서는 풍경(왕년의 대한민국 극장을 연상시키는)도 신기했다. 입원 중이신 푸미폰 국왕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방콕국제영화제는 동남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다. 올해가 7회째인데, 동남아의 정치·사회 현실이 드러나는 작품들이 꽤 눈에 띄었다. 말레이시아 정부의 이교도 박해를 보여준 <Malaysian Gods>, 장관을 살해한 인도네시아 매춘부의 이야기를 그린 <Jamila and the President>, 20세기 초 미군 점령기 필리핀에서 산으로 피신한 어느 모녀의 기구한 사연을 다룬 <Independencia> 등등.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정수완 교수(동국대)에 따르면, 올해부터 프로그래머들의 세대교체가 이뤄져 예전보다 비교적 핫한 영화들이 상영됐다고 한다. 참고로 메인 경쟁부문 금상은 페루 안데스 산맥의 수은 유출과 이 사건에 얽혀 죽음을 맞는 벨기에 안과의사의 이야기 <Altiplano>가, 동남아 경쟁부문 금상은 앞에서 언급한 <Independencia>가 받았다.
이번 방콕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들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다름 아닌 부산국제영화제였다고 한다. 아시아의 상당수 감독들이 부산에서 월드 프리미어(세계 최초 상영)를 해야 한다면서 출품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타이의 감독조차 그랬단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위상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에피소드다. 여기는 지금, 바로 그 부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