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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용] <해운대>, 올 여름 개봉 포기할 뻔했다
문석 사진 이혜정 2009-10-14

이상용 CJ엔터테인먼트 한국영화투자제작팀장

많은 자본이 투여된 한국영화 대부분이 그렇듯, <해운대> 또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몰고 다녔다. 영화가 만들어질 때는 CG의 완성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고, 개봉 뒤에는 불법 복제파일 유출 사건으로 시끄러웠으며 개봉이 마무리돼가는 현 시점에는 수익 배분에 관해서 이야기가 솔솔 나오고 있다. 이 영화의 메인 투자사인 CJ엔터테인먼트가 공동제작자로까지 참여해 배급수수료와 투자지분 외에 제작지분까지 챙겼다는 사실을 놓고 시비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CJ엔터테인먼트는 <씨네21>에 <해운대> 투자와 공동제작에 관한 의문을 해소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우리가 어떤 제작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이야기를 나눠야 의문이 풀릴 것 같다”는 이상용 CJ엔터테인먼트 한국영화투자제작팀장에게 <해운대>에서 CJ가 담당한 몫에 관한 설명과 여러 뒷이야기를 들었다.

-<해운대>에서 투자를 담당한 것은 알겠는데 공동제작사로서는 어떤 일을 했나.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JK픽처스(옛 두사부필름)와 함께 작업했다고 보면 된다. 공동제작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 영화 제작에 일정한 공헌을 했다는 말이고 리스크를 함께 졌다는 이야기다. 제작사에서 시나리오도 쓰고 감독도 뽑았고 캐스팅도 다 했는데 그저 돈을 댄다는 이유 하나로 공동제작 크레딧을 달아달라고 요구하는 투자사도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실제로 제작과정에 참여했다.

-<해운대> 프로젝트의 출발부터 함께해왔다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그때가 2007년 2월24일이다. 그때 개봉했던 <1번가의 기적> 무대인사를 위해서 윤제균 감독과 함께 부산 해운대를 찾았다. 저녁때 술자리에서 JK픽처스와 어떤 라인업을 가져갈 것인가를 이야기하는데 윤 감독이 갑자기 ‘해운대에 쓰나미가 몰려오는 설정의 영화를 만들면 어떨 것 같냐’고 하더라. 그것 참 볼 만하겠더라. 안 그래도 내가 예언서나 음모론에 관한 책을 좋아해서 실비아 브라운의 <대예언>을 읽던 때였다. 거기에는 일본에 엄청난 쓰나미가 몰려와서 전역이 피해를 입고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한번 해보자고 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부터 함께 참여한 것인가. =그렇다. ‘프리 프리 프로덕션’부터다. 사실 이 프로젝트를 놓고 가장 고민한 부분은 쓰나미 파도를 CG로 구현할 수 있냐 여부였다. 그래서 JK뿐 아니라 우리도 나름대로 국내 여러 업체와 접촉하면서 실현 여부를 타진했다. 그런데 국내 업체들은 물 CG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었다. 몇곳은 ‘해본 적은 없지만 시간만 있으면 한번 해보겠다’는 의지를 밝혔지만, 누가 봐도 100억원이 넘게 드는 대형 프로젝트에 ‘한번 해보겠다’는 말만 믿고 베팅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러던 중 <해운대>의 CG슈퍼바이저인 한스 울릭이 JK쪽과 접촉됐고 우리 또한 소개를 받았다. <퍼펙트 스톰>이나 <반지의 제왕> 게임 버전 등에 참여했던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가능성이 보였다. 결국 최초의 본격 재난영화라는 점, CG 구현이 가능하다는 점, 수익적으로도 가능성이 크다는 점 등을 고려해 함께 개발해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이 2008년 2월21일이니까 딱 1년이 걸린 셈이다.

-그 뒤로도 계속 제작에 관여했던 것인가. =시나리오는 윤제균 감독이 주도적으로 썼지만, 그 와중에도 지속적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윤제균 감독도 여러 인터뷰에서 말했지만, 애초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뒤얽히는 구도였는데 아무리 스케일이 큰 영화라도 드라마가 너무 비대하면 집중이 잘 안될 것 같아 지금의 인물 배치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대개의 할리우드 재난영화를 보면 그 재난에 맞대응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해운대의 빌딩을 폭파시켜 파도에 맞부딪치게 한다는 아이디어도 있었다. 어떤가? 그게 내 아이디어였다. (웃음) 결국 재난을 그대로 맞이하면서 겪는 사람들의 모습에 집중하자는 결론이 났다.

-협업이 그렇게 순조롭게만 진행됐나. =큰 위기가 한번 있었다. 2008년 6월 말로 기억하는데, 확정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촬영횟수나 이런저런 여건을 따져보니까 2009년 여름 개봉이 무리라는 판단이 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 촬영을 11월 중순부터 크리스마스 전까지 마쳐야 하는데, 그러려면 한국에서 11월 초까지 촬영을 마쳐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그런데 2005년부터 2007년까지의 7, 8월 기상현황을 점검해보니 비가 너무 많이 왔다. 그래서 제작사를 찾아서 제작 연기를 통보했다. 정말 한순간에 사무실 분위기가 초상집이 되더라. 그러고 나서 잠도 못 자고 다시 고민을 했다. 결국 이틀 뒤인 7월2일 다시 예정대로 제작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틀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사이에 별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만약 한국 촬영을 다 끝마치지 못한 채 미국에 가게 되더라도 한국에 돌아와 얼어 죽더라도 촬영을 마친다는 각오를 서로 다진 것이다. 또 오버되는 분량에 대해서 책임을 명확히 하자는 다짐을 들었다. 물론 거기에는 윤제균 감독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7월4일 회사 간부들이 참여하는 투자심사회의가 열렸고 거기에서 통과돼 투자가 최종적으로 결정됐다.

-결국 올여름 개봉한 것을 보니 일정상 문제는 별로 없었나보다. =2008년 8월9일 해운대 항공촬영으로 본격 일정이 시작됐는데, 한국 촬영은 총 59회차 만인 11월9일에 마쳤다. 정말 기적 같았다. 날씨 때문에 못 찍은 날은 딱 한번뿐이었다. 사실 2008년 여름은 가뭄에 가까웠는데 이건 정말 하늘이 도왔다고 봐야 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11월24일 촬영을 시작해 12월25일 끝냈으니 정말 정확히 맞췄다. 보충촬영은 단 두번밖에 없었다.

-촬영 이후 과정에서는 어떤 일을 담당했나. =주로 CG와 관련된 일이었다. 이를테면 이민기와 강예원이 헬기에 매달린 채 벌어지는 장면은 애초 CG가 필요없다고 판단했는데 나중에 따지고 보니 100컷 정도가 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 업체를 동원해야 했다.

-제작 도중 CG가 엉망이라는 소문이 계속 나돌았다. 막연히 괴담이 나돈 건 아니었을 텐데.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다. 2월 중순부터 CG컷이 넘어오기 시작했는데, 4월 중순쯤 문제가 생겼다. 폴리곤으로부터 하청받은 한국의 모팩에서 연락이 왔다. 애초에 폴리곤은 모팩에 ‘우리가 보내는 소스를 합성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도저히 합성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얘기였다. 참여한 다른 업체인 CJ파워캐스트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안되겠다 싶어서 JK의 길영민 이사와 바로 미국으로 떠났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처음보다 분량이 많아졌고 윤제균 감독과 소통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그날 한스 울릭과 장시간 회의를 한 끝에 미국쪽과의 소통 창구를 정비하기로 했고, 이 작품이 CJ나 폴리곤에나 사활이 걸린 작품인 만큼 퀄리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만약 CG 퀄리티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올여름 개봉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입장까지 밝혔다. 금요일에 떠나 일요일에 한국에 와서 월요일 출근을 하는데 다발성 두통이 도지더라. (웃음) 그 뒤로는 매일 밤 12시에 열리는 화상회의에 일주일에 두세번씩 참여했고, 막판에는 매일 나가야 했다.

-어쨌거나 흥행이 잘돼서 뿌듯했겠다. =지금은 극장요금이 올라서 550만명인데 당시에는 손익분기점이 600만명이었다. 제작 당시부터 1천만명을 기대했던 영화지만 막상 개봉일 첫날 스코어를 받을 때쯤에는 적어도 손익은 넘기겠지라는 약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첫주 스코어가 60만명을 넘는 것을 보고 이게 착오는 아니겠지라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웃음)

-전체 수익은 얼마나 되나. =정확히 계산을 해봐야 하는데, 여러 비용을 제한 뒤 극장에서 받는 돈이 3100원 정도니까 거기에 1150만명을 곱하고 수출액 등을 더하면 360억원 정도가 된다. 거기서 순제작비 138억원과 마케팅 비용 40억원, 그리고 배급수수료 10%를 빼면 146억원 정도가 된다.

-투자지분은 얼마인가. =투자지분 대 제작지분의 배분은 7:3이다. 워낙 규모가 큰 영화이다 보니 다른 펀드들에서 자본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6:4로는 유치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제작사에 무턱대고 7:3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제작수수료였다. 할리우드의 경우 스튜디오가 제작사에 일정한 제작수수료만 주고 수익이 많이 나면 보너스 개념으로 적은 돈만 지불하는데, 한국 실정에서 그럴 수는 없어서 제작수수료를 보장하는 대신 7:3으로 수익을 배분하는 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그것도 800만명까지만 그렇고 800만명이 넘은 뒤로는 다시 6:4로 조정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1150만명이라는 스코어는 참 이상적인 배분이 가능한 것 같다.

-공동제작에 대한 배분 비율과 제작수수료는 얼마인가. =제작지분의 3분의 2는 JK, 3분의 1은 CJ가 가져오는 식이다. 제작수수료는 애초 설정한 순제작비가 123억원이었는데, 제작수수료와 시나리오 개발비, 기획비, 감독 개런티, 주연급 배우들의 출연료 등을 제외한 ‘빌로 더 라인’(below the line)이 95억원쯤이었다. 거기에서 4%다.

-<해운대>를 끝내고 나니 어떤 소회가 있나. =한국영화도 매년 이렇게 큰 작품이 몇편씩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제작 규모가 커지고 계약 관계도 복잡해진다. 제작사가 혼자 감당하기 힘든 부분도 생긴다. 투자배급사와 제작사가 각자 잘하는 것을 나눠서 협업한다면 더욱 좋은 질의 영화를 좀더 매끄럽게 만들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올해는 몇편이나 자체 또는 공동으로 제작했나. =자체제작한 것이 <그림자살인>, 공동제작한 영화는 <마린보이> <해운대> <시크릿> 정도다. 일부에서는 우리가 공동제작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아는데, 인원 여력도 충분치 않은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삼성영상사업단 출신으로 영화계에 꽤 오래 있었던 것으로 안다. =나는 상대 경영학과 출신인데, 졸업 무렵의 꿈은 007 가방 하나 들고 전세계를 도는 비즈니스맨이었다. 그래서 삼성물산에 지원해서 합격한 거다. 그때가 1994년 2월인데 당시 삼성물산은 드림박스라는 비디오 사업을 했고 캐치원이라는 케이블TV도 운영하면서 영상본부를 꾸렸다. 나는 신입사원으로서 그해 10월 영상본부의 영화투자제작 파트에 배치됐다. 그때 <돈을 갖고 튀어라> <코르셋> 같은 영화를 맡았다. 95년에 삼성영상사업단이 생겼고 99년에 해체됐다. 그리고 삼성물산에 복귀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는데 도저히 못 가겠더라.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더니 개중 비슷한 제일기획으로 발령이 났다. 그런데 영화 일을 한 사람이라 그런지 적응이 안돼 거기도 6개월 만에 그만뒀다. 영화란 게 좋게 말하면 매직, 나쁘게 말하면 마약이더라. (웃음) 그 뒤 KTB에 들어가 <눈물> <번지점프를 하다> 등을 투자했고 2002년쯤 그만두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CJ에 들어온 것은 2005년 10월이다.

-투자 일을 꽤 오래한 편인데, 이제 뭐가 보이나. =보이긴 뭐가 보이나. (웃음) 확실히 안될 영화는 조금 보이지만 이 영화 무조건 터진다, 이런 건 여전히 모르겠다. 영화라는 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하는데 해보니까 ‘하이 리스크 로 리턴’이더라. 결국 중요한 건 큰 위험성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같다. 잘될 작품 같아서 욕심을 내 ‘몰빵’을 하면 안된다는 얘기다. 시나리오를 볼 때도 나름 정한 원칙이 ‘7:3의 원칙’이다. 익숙하고 친숙한 부분이 70%, 새로운 부분이 30% 정도 돼야 흥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언젠가부터 갖게 됐다. 물론 그게 투자의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정답이 보이기는 하려나.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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