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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시절> 냉소의 자리에 희망의 언어를 채우다
이화정 2009-10-13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가장 적극적이고 영화적인 판타지 <호우시절>

허진호 감독이 서울을 떠났다. 아니 그의 연인들이 서울을 떠났다. 그가 서울을 떠나는 건 여행이나 휴가가 아닌, 늘 새로운 사랑을 만나기 위한 준비였다. 낯선 곳에서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격렬한 사랑, 이별을 경험해냈다. 중국 청두, 그의 연인들을 만나게 한 그곳에서 허진호 감독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이번 사랑에선 냉소보다는 따뜻함이, 안타까움보다는 희망이 느껴진다. 말 그대로, 새로운 허진호의 사랑 <호우시절>이다.

한국에서 중국 청두로 향했을 때 생기는 1시간의 뒷걸음질. <호우시절>은 자오선 남쪽, 한 시간의 시차가 불러온 사고 같은 사랑이다. 건설 중장비 회사 팀장 동하(정우성)는 청두 출장길에서 우연히 미국 유학 중 만난 메이(고원원)와 두보초당에서 재회한다. 쓰촨으로 출장 간 남자와 ‘쓰촨이 고향이라’ 그곳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여자 둘 모두에게, 생각지도 않던 만남은 분명 우연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남자의 출장으로 주어진 짧은 시간, 과거 그들이 지나왔던 긴 시간의 그림자를 되밟는 동안 둘의 관계는 우연을 넘어 풀어야 할 운명으로 대치된다. 희미한 옛 감정은 이제 숨막힐 듯 설레는 현재의 감정이자, 지켜내야 할 새로운 사랑으로 변모한다.

사랑의 타이밍을 고민하는 영화

허진호 감독의 장편 <호우시절>은 사랑이 가진 무한한 속성들 중에서 꼭 집어낸, 타이밍에 관한 질문이다. ‘그때가 아니라 지금이었더라면…’이란 가정법으로 분류되는 회한의 옛사랑. 멜로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크게 고민하는 허진호 감독은 다섯 번째 장편에서 그 추억을 조심스레 끄집어낸다. 단언컨대 그리 반길 만한 선택은 아니다. 누구나 지나간 사랑을 추억하고, 그 사랑에 대해 안타까워하지만, 그 감정은 술자리에서 나눌 법한 하룻밤의 안줏거리 이상이 되기엔 역부족이다. 대학 시절 시인이 되고 싶어 했던 영화 속 동하가 ‘첫 월급 타면 그만두고 글을 써야지 했는데 월급이 들어오고 다시 월급이 들어오고’ 그래서 샐러리맨으로 주저앉고 말았다는 식의 후회는, ‘사느라 바빠서, 그러고 나선 여자친구가 생겨서’ 과거의 메이를 잊어버렸다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중량의 무게다. 과거라는 ‘상상’에 첨벙 발벗고 뛰어들기에 현실은 너무 복잡하며, 또 그 현실 속의 나는 과거의 나와 분명 다른 나이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허진호 감독은 이 과거와 현재의 접점에 전에 없이 ‘희망’이란 언어를 선사하려 든다. 전작의 연인들을 향해 던졌던 사뭇 날서고 냉소적인 시선들을 모두 거둬들이는 대신 그는 동하와 메이의 사랑을 이어주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적극적인 사랑의 메신저를 자처한다. 그러니 새로 시작되는 둘의 ‘가정법’은 어쩌면 이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가장 적극적이고 영화적인 판타지일지 모른다. 지금은 변해버린 현재의 ‘나’일지라도, 이 짧은 상상에 굳이 관대해지지 않을 필요는 없다.

밀고 당기기 끝 홍상수식 ’짖궂은 농담’이…

<호우시절>의 3박4일은 말 그대로의 물리적인 시간을 뜻하지 않는다. 동하와 메이에게는 지금의 급작스런 만남이 있기 전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전사가 있다. 플래시백이라는 친절한 설명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혹은 <비포 선셋>의 연인의 과거인 <비포 선라이즈> 같은 전작이 없더라도 그들의 과거는 지금의 반가운 감정을 완성해줄 커다란 괄호 같은 것이다. 이미 한참은 묻어두어 바래졌을, 혹은 이 기회가 아니라면 결코 끄집어내지 않았을 그들 각자의 과거, 허진호 감독은 이 헤묵은 공백을 동하와 메이의 사랑 게임에 적극 활용한다.

동하의 기억 속 메이와 메이의 기억 속 동하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연애를 갓 시작한 연인의 티격태격 밀고 당기기만큼이나 사소하고 닭살스럽고 (제3자에게라면)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작업 멘트처럼 ‘실용적’으로 사용된다. <아비정전>의 장국영이 장만옥을 향해 기억해두라고 했던 ‘함께했던 1분 전’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이 함께했던 십년 전, 혹은 8년 전(언제가 됐든 그 옛날)은 자기 편의에 맞게 맘대로 각색되고 재편되어 있다. ‘넌 원래 재미없었어’ 하고 말하는 여자에게 ‘나 무지 재밌었어’ 하고 굳이 웃음을 증명하려는 건 남자의 흑심이자, 남자가 선물로 주고 간 자전거를 ‘무슨 자전거? 그거 팔아버렸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건 그 시점에서라면 어떻게 봐도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여자의 속내다. 그건 마치 <비포 선셋>의 ‘셀린느’(줄리 델피)가 다시 만난 옛 연인 ‘제시’(에단 호크)를 향해 ‘우리 둘이 그날 섹스를 했다고? 난 콘돔 없인 절대 섹스 안 하는데’ 하고 기억을 감추고 시침 떼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침내 ‘니가 사코토랑 사귀었잖아’, ‘말도 안 돼. 넌 벤이랑 사귀었잖아’ 하며 공방전을 벌이던 남녀가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데’라고 확인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건 급기야 둘이 서로의 감정을 떠보기 위해 한발 더 나아갔음을 일러준다.

가벼운 탁구공이 눈앞에서 튕기며 재빠르게 오가듯, 스크린 속 두 남녀의 대화는 진지함을 뒤로 감춘 채 쉴새없이 오간다. 이 경우, 청두의 거리를 거니는 동하와 메이는 ‘라면 먹고 갈래요?’(<봄날은 간다>)라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허진호식 대사를 꺼내는 대신, ‘내가 너랑 키스한 걸 증명하면 같이 자줄게’라는 급기야 홍상수 영화 속 연인을 떠올리는 제법 짓궂은 농담으로 그들의 감정을 내비친다. 물론 빠른 실행이 뒤따르진 않는다. 어디까지나 <호우시절>은 허진호 감독이 건네는 제법 착한, 동화 같은 상상이니까.

시간 제약, 판타지에 현실감 불어넣어

허진호 감독의 영화 속 시간은 꼬리를 물고 끈질기게 돌아갔다. 봄에서 시작된 계절은 여름을 지나고 때로 눈 쌓인 겨울로 마무리됐다. 그건 사랑이 채 시작되기도 전 사랑을 급하게 마무리(<8월의 크리스마스>)해야 할 때조차 마찬가지였다. 카메라는 금세라도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던 뜨거운 여름으로 시작해서, 사랑의 대상이 사라지고 난 뒤 눈 쌓인 겨울까지 기어코 잡아냈다. 그건 사랑이 결국 삶의 일부라는 걸 증명하는 허진호식의 당연한 철학이었다. <호우시절>의 계절은 꿈쩍하지 않는다. 짙은 녹색잎이 나오기 전 여린 잎의 연두는 영화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하나의 통일된 색감이다. 3박4일간의 만남, 그들은 계절을 염려하지 않는다. 당장 내일 아침 서울로 떠나야 하는 비행기 시간, 공항 커피숍에서의 서울발 비행기의 안내 멘트. 서울 회사로부터의 출근 요구. 시간은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점잖은 철학자가 아닌, 이렇게 짧고 지속적으로 그들의 만남에 딴죽을 거는 훼방꾼으로 등장한다. 허진호 감독은 전작들에서 한 조각 떼어낸 듯 압축된, 이 심술궂은 시간을 동하와 메이의 사랑에 개입시킨다.

3박4일의 제한된 시간 속에서 펼치는 이 게임에서 승리를 자신할 수 있는 건 결국 시간밖에 없다. 반가움에서 시작된 만남은, 제한된 시간으로 인해 결국 선택을 강요한다. 둘은 자주 이 선택에 휘말리는데, ‘너 이제 가야 하지 않니?’하고 싫더라도 헤어질 시간을 주지해주어야 하는 여자를 앞에 두고 남자가 ‘여기 리필 한잔 해주세요’ 내지는 ‘나 하루 더 있다 갈까’ 하고 시간을 연장시키려는 장치를 건네는 식이다. 달리 방법이 없다. 어느 날 삶에 침입한 이 사랑을 지속하려면, 각자 가지고 있는 현실의 시간을 향해서 그들 스스로 물음을 던져야 한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게 될지 몰라도 이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은 메이, 낯선 곳에 출장 와서 무단결근을 하더라도 기필코 과거의 사랑을 되찾고 싶은 동하. 불쑥불쑥 예고편처럼 끼어드는 현재라는 시간은 그래서 둘을 더이상 아련하고 기분 좋은 추억에 매어두지 않는다. 그럼으로 인해 <호우시절>의 판타지는 점점 현실과의 접점을 찾아간다.

서울을 떠난 이 영화의 공간은 그래서 꽤 중요한 것 같은 소재지만, 사실 영화에서 그렇게 크게 의미를 갖지 못한다. 청두가 동하의 출장지가 됐건, 아님 짧은 여행이 되었건 어느 쪽이든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청두를 떠나는 순간 깨어질 제약이 존재하지만, 방점은 기억 속에나 존재했을 둘이 현실에서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에 찍어두어야 한다. 청두 관광청의 협조로 시작됐지만, 이 영화에서 보아야 할 것은 그래서 정갈하게 촬영된 청두의 거리도, 두보초당에서 인상적으로 포착된 시인 두보의 동상도 아니다. 동하가 두보초당의 굽은 길을 따라 메이를 만나게 되는 과정은 <이웃집 토토로>에서 꼬마 소녀 메이가 길을 따라 숲속의 정령에 도달하듯 호기심 충만하지만, 그건 길에 대한 것이 아닌 옛 연인을 만나는 데 대한 반가운 감정의 크기다.

카메라가 잡아내는 것도 결국 반가운 듯 발을 내딛는 동하의 표정이다. 와이드한 화면으로 카메라는 줄곧 광장에서 시민들이 만들어내는 왈츠,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돌리는 바람개비, 촉촉하게 비에 젖은 청두의 뒷골목 모두를 담아내지만 그것들은 말 그대로 둘의 진행 방향을 따라 흘러갈 뿐이다. <호우시절>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은, 그래서 둘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풍경을 말끔히 잊어버리는 순간, 오롯이 두 남녀가 서로 각자만을 바라보고 생각할 때에야 찾아온다. 공원의 판다가 그들 데이트의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사용된다거나, 대나무 밭에서 두 남녀가 숨을 곳을 찾아 키스를 나눌 때 그 허둥거림은 침범할 수 없는 둘의 새로운 ‘역사’, 기억해두어야 할 사랑의 순간이 된다.

허진호의 가장 어린 연인들

몇몇 인상적인 장면에도 <호우시절>은 허진호 감독의 멜로를 오랜 연인처럼 사랑하는 관객에겐 배신이 될지 모른다. 관객의 가장 순수한 첫사랑으로 남은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가졌던 이미지를 깨고자 감독 스스로는 부단히 노력해왔지만 관객에게 그 이미지는 항상 깨서는 안될 사랑의 원형처럼 작용해왔다. <호우시절>은 변화를 갈망한 허진호 감독이 그간에 주었던 변주가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되는 작품이다. 전에 없던 코믹한 상황들을 아주 빈번히 사용하고, 또 흔들리는 남녀의 감정을 움직이는 카메라에 담아내면서 두 남녀의 사랑을 수식하고 보충하는 새로운 시도들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가벼운 표현방식 속에 <호우시절>의 연인이 자신의 속물 같은 속내를 드러내는 대신, 조금은 편한 방식, 안전한 방식의 연애를 하고 만다는 점이다. 물론 허진호 감독의 전작이 선사했던 풍성한 대화의 부족에는 영어로 진행되어야 하는 대사의 제약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니 전작의 치열했던 연인들, 좀더 어른스러웠던 현실의 연인이 그립다면 <호우시절>의 연인은 분명 너무 아름답고 ‘어리다’. 그러나 이 어린 연인들의 사랑이 새로 시작하는 그의 영화 같아서, 밉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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