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것부터 최근의 것에 이르기까지 박진표 영화의 한결같음은 <내 사랑 내 곁에>에서도 확연하다. 떼를 쓰듯 몰아붙이는 눈물 짜내기 서사를 계승할 뿐 아니라 중심 인물의 소상한 삶의 내력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점에서도 상통한다. 만나서 불타오르면 되었지, 전후 문맥이 뭐 그리 중요하냐는 투다. 한편으로 박진표는 최루성 신파 서사 아래 죽음을 생의 연속으로 달관하려는 또 하나의 속이야기를 매설함으로써 새로운 의미의 차원을 얻어내려 한다. 그러나 두 가닥 이야기가 서로 겹치고 대조되면서 상승하지 못하는 까닭에 이 두 음색의 조화는 요원해 보인다.
가공스러운 것은 김명민의 ‘몸’이다. 일체의 정황이 불치병 신파의 도식을 따르는 이 영화에서 김명민의 몸은 불가사의다. 작중 배역의 기질과 속성에 완전히 젖어들 때까지 몰입해가는 메소드 연기의 화신쯤으로 여겨지는 그라 할지라도 이 모험은 특별해 보인다. 루게릭병에 걸린 남자를 재현하는 일이란 일류 지휘자의 습성을 내면화(<베토벤 바이러스>)하거나, 수술을 집도하는 천재 외과의사의 손동작을 흉내내는 일(<하얀거탑>)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종류의 미션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루게릭에 ‘반응’하는 김명민의 몸
배역 창조를 위해 들인 배우의 각고를 치하할 의도는 없다. 다만 김명민에게선 한 배우의 집념이나 독기와 다른 차원이 느껴진다. 배역을 향한 단호한 의지를 메소드 연기의 정수로 평가하는 분위기지만, 난 김명민의 방식이 메소드적인 몰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배우는 여기서 배역을 향한 몰아적 동일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희귀한 질환의 ‘징후’를 몸 위에 새긴다. 결정적으로 그의 몸 안에는 루게릭을 신호할 만한 증상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순전히 상상만으로 꾸며낼 수도 없는 징후는 필연코 몸의 자동반사를 요구한다. 배우의 몸이 곧 질환을 신호하는 지표가 되는 셈이다. 이 특별한 생체의 메커니즘을 검토하는 일은 퍽 긴요하다.
김명민은 학습이나 훈련이 아니라 반사적인 적응을 요구하는 방법론을 택한다. 그의 방식은 <오아시스>에서 문소리의 지체장애 연기와 유가 다르다. 캐릭터를 창조하기 위해 신체가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 자체가 연기가 되도록 만드는 것의 차이(어느 한쪽이 우월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라고 할까. 문소리가 훈련하고 반복하는 과정을 거쳤다면 김명민은 음식을 공급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자동반사적인 신체의 반응이 곧 연기가 되도록 하는 아주 희소한 방식을 쓴다. 그러니까 <내 사랑 내 곁에>는 말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루게릭 환자를 ‘연기’한다기보다 루게릭에 ‘반응’하는 김명민의 몸에 관한 영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메소드적 동일시나 심리묘사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육질적인 반응을 따르는 배역의 신체적인 구현이라는 점에서 김명민의 퍼포먼스를 ‘생체역학 연기’라고 부를 수 있다.
생체역학 연기의 바탕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에 이르는 길이 심리적 경험이 아닌 신체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이를테면 ‘아프다’는 느낌을 갖고 행한 연기보다 배우의 몸에 새겨진 생채기가 더 감각적으로 ‘아픔’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생체역학에 따르면 눈썹을 씰룩이거나 동공의 크기를 확대하는 것만으로도 배우는 충분히 공포를 표현(영화의 말미 김명민은 이런 방식으로 연기한다)할 수 있다. 앙칼진 목소리와 한올 눈썹의 흔들림, 경미한 근육의 진동도 거대한 감정의 해일이 된다. 이 유물론적인 방식은 상상력이 아니라 신체의 움직임이나 형상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또한 전통적으로 강조되었던 심리나 감정표현의 우위를 신체의 우위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참신한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심리의 적응력을 훌쩍 앞지르는 신체의 적응력을 근간으로 하는 생체역학을 실현하기 위해 배우는 민첩하고 정확하게 반응하는 몸의 표현을 상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루게릭을 특수효과나 CG가 아니라 실제 말라가는 신체 변형을 통해 구현하리라고 작정한 김명민의 결심은 안쓰럽지만 타당한 것이었다. 질환의 심화와 죽음의 공포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데서 고통받는 몸만큼 투명한 신호는 없기 때문이다. 고로 김명민의 경이는 20kg 감량이 아니라 악화되는 병증과 보조를 맞춘 20kg 감량이다. 루게릭 환자의 근육 양 감소 추이에 따라 체중을 줄여간 이 점차적인 야윔의 느낌은 충격적이다. 요컨대 그것은 만져질 듯 생생하고 구체적이고 물질적이다. 다소 과장을 보태자면, <내 사랑 내 곁에>는 김명민에게 스포츠영화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인드 컨트롤보다 까다로운 피지컬 컨트롤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세차를 하다 그가 땅바닥에 고꾸라져 파닥거리는 동작을 취할 때, 급속히 야위어가는 신체를 전시할 요량으로 침대 위에 알몸으로 부려질 때, 그저 말라가는 것이 아니라 병의 징후로 몸이 변형되어간다는 착각을 줄 때, 이런 느낌은 완연해진다.
로맨스보다 더 슬픈 것은…
심지어 중·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 김명민은 연기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병세가 악화되어 말을 할 수 없고, 몸도 움직일 수 없게 되어 표현의 수단(대사, 액션, 표정)을 빼앗긴 배우가 된 것이다. 나무 등걸처럼 휘어지고 비틀린 몸이 상황을 증거할 따름이다. 마네킹처럼 침대에 누워 눈알을 굴리거나 입을 삐죽거리는 것이 고작인 이 배우가 자신을 입증할 수단은 몸뿐이다. 이때부터 나타나는 몸의 반응은 무의식에 따른 것이다. 김명민은 이 순간부터 루게릭 환자에 몰입하기보다 배역으로부터 이완되어 자신의 연기를 의식할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말과 액션을 상실한 순간부터 개입하는 내레이션은 몹시 거슬리는데, 생체역학 연기가 자아내는 다성적 뉘앙스를 내레이션이 평면화시킨 때문이다. 말은 종종 이미지를 압도해버리지 않는가. 모든 것이 투명하고 확실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복합적이고 모호했던 김명민의 몸이 내밀하게 표현하도록 내버려두었더라면, 더 감각적이고 다기한 의미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김명민은 이 영화의 제반 요소들과 따로 논다는 인상을 준다. 감정의 과잉과 번다한 치레가 넘치는 이 영화에서 그의 몸은 유일하게 ‘사실’(fact)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쳐 말해 그것은 몸의 다큐멘터리인 것이다. 이 영화의 진정한 스펙터클은 피부를 뚫고 나올 것 같은 갈비뼈와 병증이 여실한 눈두덩, 공기 빠진 풍선처럼 푸석한 피부의 질감에 있다. 죽음에 면한 자의 불가항력을 그의 몸은 무연히 형상화한다. 하여 <내 사랑 내 곁에>에서 가장 생생한 슬픔은 애처로운 로맨스에 있지 않다. 저들의 기구한 사랑이 슬픈 것이 아니라 김명민의 몸이 슬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