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들은 전혀 발견하지 못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보고 싶어하지도 않을 영화들을 밤을 새워가면서 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내장이 튀어나오고, 피가 넘쳐나는 유혈낭자한 영화들을 보면서도 까르르 웃어젖히며, 옛날 추억의 만화영화들을 보면서 주제가를 따라부르기도 하고,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희귀한 영상들(지나간 CF 및 촌스럽기 그지 없는 일련의 뮤직비디오들)을 모아다가 그것들로 밤을 지새우곤 한다.
비주류영화 사랑모임 ‘베드 테이스트’.
피터 잭슨의 <고무인간의 최후> 원제목에서 따온 그들의 이름처럼 그들은 결코 평범하거나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것들에는 좀체 시선을 주지 않는다.
나는 그들과 함께 혼자서는 도저히 찾아보지도, 보고 싶어하지도 않았을 무수한 영화들을 함께 보았다. 거기엔 <사우스 파크>도 있었고, 트로마의 악취미성 영화들도 있었으며, 가학적인 일본호러영화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부러 엽기스러운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즐기며, 또한 열심히 찾아보려는 이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많은 것들을 빚졌다. 평소의 소양대로라면 도저히 발견하지 못하고 말았을 무수한 보석(?) 같은 영화들을 그들은 나에게 알려주었고, 함께 보며 즐거워했다.
<야밤녀>라는 제목의 이 묘한 영화 또한 이들과 함께 발견한 숨겨진 영화 중 하나다.
그리 오래지 않은 98년에 제작된(좀더 정확히는 98년에 비디오로 출시된) 이 영화는 겉표지의 섹시한 금발미녀 사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3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여배우와 두 남자배우가 출연하는 에로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본디 관객이 에로영화에 기대하는 것들을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뻔뻔스럽다 싶을 만큼 뚝심있게 다른 쪽으로 영화를 밀고 나간다.
한때 문학계에서 한획을 그었을 법한 소설가 선생님. 그러나 그는 10년째 지병으로 인해서 밤마다 몸이 타오르는 부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타오르는 사모님의 시야에 잡힌 사나이가 있었으니….선생님에게는 박군으로 사모님에게는 미스터 박으로 불리는 사나이. 그는 선생님이 출강했던 모 대학 시절부터 선생님을 존경하며, 지금껏 선생님의 뛰어난 재능을 이어받고자 문하생으로 들어와 있는 풍채 좋은 남정네다.
이쯤 되면 이들 셋간에 일어날 일들은 뻔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뻔한 것을 너무나도 뻔뻔하게 풀어간다.
마치 에드우드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이 작품은 동시대에 나왔던 깔끔한 에로영화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전통적인 한국 에로영화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장소는 일정하며, 비디오로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전 필름 에로영화마냥 한번 슛이 들어가면 웬만한 어눌한 연기 및 주변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촬영을 감행한다.
거기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들. 즉흥적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어가며 연기하는 그들의 땀내 가득한 연기는 결코 웃음없이는 감상하기 힘들다.
특히 선생님과 박군과의 장장 10분여에 달하는 롱테이크 연기는 그중 압권이라 할 만한데, 두 배우의 불꽃튀는 애드리브 대결은 물론, 그동안 써왔다고 전해주는 원고란 것이 겨우 A4 4장에다가 그것도 뭔가 적혀 있는 것은 2장 정도밖에 안 된다.
물론 이런 보석 같은 장면들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박군과 사모님의 장면들은 대개 “미스터 박, 내 몸이 타…”, “사모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발…” 등의 동일한 대사들로 구성되어 무려 수십 차례 오가며, 모두 다 롱테이크인 탓에 가끔 배우가 웃음을 애써 참는 눈물겨운 장면도 건질 수 있고, 사모님의 대사 중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사투리 등도 간간이 맛보는 재미가 있다.
참고로 영화 감상시에 유의할 점은 영화의 자체 사운드가 열악한 관계로 파도소리에, 때론 설거지하는 물소리에 대사가 묻힐 때도 있으니 꼭 헤드폰을 끼고 영화를 감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생생한 그들의 대사를 들을 수 있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영화장면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난다.
앗, 그리고 하나 더. 헤드폰을 끼고 영화를 감상하다보면 숨은 보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힌트는 “저… 거기 들어가면 안 되나요? 부르르르릉…(오토바이 소리).”
영화 속 이야기와 영화를 찍던 당시 상황까지 고스란히 전해주는 이같은 영화가 또 있을까? 반드시 이 영화는 꼼꼼히 배우들의 표정 하나하나, 주변상황 하나하나를 체크하면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더욱더 힘차게 웃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푸하하하하!
민동현/ 단편영화 <지우개 따먹기> <외계의 제19호 계획> 연출